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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有朋自遠方來

by 愛야 2006. 3. 31.

오늘 너를 만나기 위해 어제부터 설레었어.

멈추지 않는 창밖의 바람 탓만은 아니였지.

내가 고향을 떠나온 후 운이 좋으면 일 년에 몇 번 스치듯 아쉽게 만났지.

깊은 이야기 할 틈도 없이, 몇 마디의 안부와 한숨만으로도 시간은 늘 부족하여 해갈되지 않은 마음으로 헤어지곤 했었지.

하긴 애초에 우리에겐 건너뛰어야 할 세월의 간극이 없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어.

그래, 그것이 옳아.

 

오늘만 해도 그랬었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는 찰나에 우린 서로의 가슴 밑바닥까지 가 닿아버렸지.

돌아가야 할 시간을 가늠하지 않기로 한 오늘은 얼마나 자유로왔는지 몰라..

오후의 시간이 우리 앞에 선물처럼 펼쳐져 있었지.

팔짱을 끼고 느리게 걸으니, 희희낙락 웃을 준비가 다 된 듯하였어.

 

교직에 매여있는 네가 자유로왔으면 했어.

선생님, 하며 깜짝 놀래킬 사람 아무도 없는 이곳이 너를 즐겁게 만들길 바랬어.

오늘 오후는 마음놓고 이리저리 배회하기로 했었지.

목적지 없는 방황조차 행복할 만큼, 짜여진 생활의 부대낌 속에 있었던 게 분명해. 

 

국제시장을 기웃대며 목젖 보이도록 웃다가 어묵꼬지를 사 먹고 고소한 호떡을 탐내기도 했지.

자갈치시장의 은빛 갈치를 괜스레 흥정하기도 한 우린 영락없이 촌스런 아줌마들의 모습이었어.

붕어빵과 돼지머리를 신기하게 구경하는 외국인을 우리가 또 구경하며 킬킬거렸어.

 

드디어 해질 무렵이 되었어.

적당한 피곤과 도심의 네온이 술을 부추켰어.

어찌 맑기만 한 영혼으로 헤어질 수 있겠니.

차가운 맥주를 앞에 놓고 마주 앉은 우린 30년 세월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어.

우리가 친구되기 시작했던 시절엔 존재하지 않았던 자식과 가족들이 그 사이 생겨났어.

우리들을 향해 엄마, 당신이라고 부르는 낯선 존재들 말이야.

 

너를 처음 만났던 가을날이 생각나.

나에게 각인된 그 시절 네 모습은 한 가지야.

푸른 미니원피스에 흰 삭스를 무릎까지 신고 앞머리를 직선으로 자른 촌스런 생머리의 모습이야.

그 모습에서 한 치도 나아간 것 없어 보이는데, 왜 우린 스무 살이 아니지?

갑자기 모든 것이 어리둥절해.

빛나는 시절이란 언제나 추억 속에서만 가능한 거야?

 

잔을 부딪혔어.

알콜이 마음의 강파름을 기화시키며 순식간에 우리들을 20대 후반쯤으로 데려다 놓았지.

앞이마의 흰머리 몇 가닥은 흐린 불빛 아래 보이지도 않았어.

사랑으로, 혹은 상처로 힘겨웠던 시절도 지나고 나니 아름답게만 보여.

그때처럼 너는 오늘 나에게 묻는구나.

 

"요즈음 무엇이 너를 괴롭게 하느냐. 털어놓지 않는 너가 몹시 섭섭하다."

 

아, 내 마음의 병듦을 알았구나.

만약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다만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죽고 사는 문제를 빼고나니 이 세상에 대수로운 일이 없더구나.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나누었지만 또 어찌 뒤집어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이가  아니냐.

 

하지만 굳이 듣기를 원한다면, 지난한 인생의 한 장을 덮느라 그러하다고 말하마.

그리고 덧붙여 말하마.

우리들의 지독하게 깊은 신뢰는 부질없는 몇 마디의 고백으로 저울질 되지 않는단다.

그러니 나의 말하지 않음을 이유로 우정을 의심치 말아라.

섭섭하더라도 섭섭해 하지 말아라.

 

너를 보내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이토록 휘청거리네.

겨우 술 몇 잔의 핑계를 붙여서라도 슬픔을 풀어 볼까.

뻐근해 오는 목울대를 숨길 수 없구나.

아까 우리가 말했었나, 자유냐 소유냐를 택하라면 자유라고.

자유를 택한 우리의 영혼이 진정 자유롭기를 바래.

그러면 다시 만나는 순간이 아주 먼 훗날일지라도 빛처럼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테지.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오늘밤은 낮은 베개 높이 베고 잠들 수 있지 싶어.

누구의 시구절인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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