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퇴근하여 오자마자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달고 맛있는 수박 사세요. 포도 사세요. 차에 과일을 싣고 다니는 행상의 마이크 녹음 소리다. 어두운 밤까지 다니는 걸 보면 오늘 장사가 시원찮았던 모양이었다.
퇴근길은 언제나 지쳐서 무거운 과일을 잘 사지 못한다. 특히 수박이라니, 그 덩치를 어떻게 들고 온단 말인가. 그런데 마침 아파트 앞 골목에 친절히 와 외치는 것이다. 나는 끝물인 수박에의 유혹으로 잠시 망설였다. 퇴근후엔 되도록 지상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엘리베이트 없는 4층이라 지친 무릎은 계단이 한없이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수박이라지 않은가. 에라 모르겠다 힘 한 번 쓰지 뭐, 지갑을 들고 내려갔다.
중간 크기의 수박을 잘 익었다는 말만 믿고 샀다. 요즘은 옛날처럼 세모꼴로 따서 속을 보여주며, 자 봐라 잘 익었제? 하지를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저 장님 문고리 잡듯이 이리저리 통통거려보고 고개도 갸우뚱 혹은 주억거리다가 잘 익었어요, 아니면 가져 오세요 라는 장사말만 믿고 산다. 설령 잘 익지 않아도 쪼갠 수박 들고 바꾸러 오는 사람이 몇 있겠느냐 싶어 그럴까?
수박을 사는 순간, 뜨내기 트럭에 사서 괜찮을까 하는 마음이 스쳤다. 늘 오는 아저씨도 아니고, 동네가게도 아니니 차 몰고 휘리릭 가 버리면 그만이다. 작년에 너무 말도 안 되는 수박을 사서 바로 나갔더니 이미 온데 간데 없었던 경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로 팔러 다니는 장사라고 못 믿는 것 같아 곧 나의 편견을 반성하였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성할 필요가 없었다. 수박은 맛있지 않았다. 속엔 흰 심지 같은 것이 얼기설기 있는 하등품이었고 수박맛 아닌 호박맛만 났다. 실패였다. 나는 내일 오전 11시를 기다리지 않은 인내심 부족을 반성했어야 했다.
매일 오전 11시에서 11시 30분 사이에 아파트가 있는 긴 골목을 지나가는 과일차가 있다. 제철 과일을 싣고 일정한 목소리와 속도를 가지고 지나간다. 내가 이 아저씨에게서 과일을 산 적은 손가락 꼽을 정도인데, 이유는 너무 빠른 속도로 차가 지나가 버려서 일하다가 4층에서 달려 내려갈 틈을 놓치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정한 장소를 통과하는 그 아저씨는 자신의 과일에 대한 자신감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나쁜 물건을 어느 동네에서 팔아치웠다면 다시 같은 품목을 싣고 그 동네로 가겠는가. 아마 빙빙 피해 다닐 것이다. 주민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때까지.
나는 그 과일장수를 수박파는 칸트라 했다. 그 냉철한 철학자처럼 칼같은 시각은 아니지만 손님에게 과일을 팔아야 하는 가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만하면 칼과 진배없었다. 칸트에게서 수박을 처음 사던 작년 여름 언젠가, 잘 익었을까요 하자 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안 익었으면 내일 이 시간 지나갈 때 바꾸세요. 맨날 요맘 때 지나가요. 그의 맨날 같은 시간대에 지나간다는 말이 얼마나 큰 믿음을 주었던가. 나는 마음이 활짝 개어 수박을 샀다. 물론 다음날 수박을 바꾸러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흠이라면 약간 비싸다는 것이다.
칸트는 어쩌면 평생을 과일장사 했을지도 모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같은 코스를 일정히, 무덤덤하게, 차를 한참 세워놓지도 않고 누군가가 부르지 않으면 그저 늘 하던 속도로 외치며 지나갈 것이다. 같은 길을 매일 당당히 갈 수 있다는 것, 쉬운 일상인 듯해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잘 살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 일에 대해 얼만큼의 자신과 성실함을 가지고 살아갈까. 과연 눈속임이나 사탕발림의 행위는 없었을까. 글쎄, 약간의 포장은 있을지 모르나 남을 기만하여 내 이익을 추구해 본 적은 없다. 이건 빚진 돈을 아직 못 갚고 있는 문제하곤 다른 것인데, 그건 내 생각이고, 타인이 나 혹은 내 말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적이 왜 없겠느냐고 생각은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이나 마음 주눅들지 않고 지나갈 수 있나? 혹 피해 가야 할 곳이나 고개를 돌리며 가야 하는 곳은 없는가? 누구에게나 고개 숙이지 않는 눈으로 살아갈 수 있나? 어쩐지 자신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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