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무더위를 가시게 한다고 언제나 등장하는 것이 귀신이다.
귀신이 덜 덥게 해 주는지 난 아직 모르겠다.
지난 주말도 방송사마다 주말의 영화를 한국 귀신 영화로 때웠다.
신경질이 나서 오싹하기는커녕 열이 확 치솟으며 욕이 나오려고 입술이 달싹하다 말았다.
우리 영화의 귀신 패턴은 참 한결같다.
전통적인 한국형 귀신 모습과 전설의 고향的인 인과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흰 옷 검고 긴 머리, 피 묻은 얼굴과 시퍼런 조명의 전형에 최근의 일본풍이 가미된 연출.
단지 그 갑작스런 등장 때문에 으악 하게 만드는, 깜짝쇼 하는 귀신.
관객을 째려보는 눈초리...딴에는 어때? 이 정도면 으스스 하지 않니? 하는 모양인데 글쎄다.
간혹 코믹 귀신도 등장하지만 귀신의 코믹이라는 의외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치졸하게 흘러간다.
귀신은 왜 신원(伸寃)과 복수만 오로지 생각하며 산 자의 곁에 나타나야 할까.
귀신영화라고 귀신같은 모습의 귀신만이 꼭 나와야 할까.
말하고 보니 이상한 표현이 되었지만, 귀신이란 결국 육신을 떠난 영혼이 아니던가.
지금 생각하고 느끼는 내 영혼이 곧 귀신이 아닌가.
내 속에도 예고된 내 귀신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머잖은 장래에 나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면 나도 귀신이 되어 원한이 없는 한 제사상 앞에서 자손과 만날 것이다.
언젠가부터 한국형 귀신 영화가 싱겁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싱겁다라는 것이 무섭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잔혹하고 섬뜩한 분장의 배우를 보며 간을 졸여야 했던 상황이 영화가 끝난 후 생각하면 어이 없다.
귀신 영화라고 궁극적 주제가 '무서움'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고 나면 남는 건 가장 무서웠던, 꿈에 볼까 무서웠던 몇 장면이 다이다.
주제는 기껏 올려봐야 '착하게 잘 살자'란 말인가.
원래 귀신 영화에는 흥미가 없기도 했지만 나이 탓이라고 밀어붙이기엔 억울하다.
잘 만들어진 귀신 영화나 적어도 가상의 것일지언정 몰입이 되는 영화를 보지 못한 탓이다.
비명만 지르게 하는 귀신이 아닌 진지한 귀신 영화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인데, 아쉬움이 화를 부채질한다.
저 유명한 <사랑과 영혼>의 원제목이 <Ghost>
영혼, 귀신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으로 감동을 주며 아름답게 다가올 수 있다.
<식스 센스>의 바바리 입은 매력적인 블루스 윌리스 귀신은 어떤가.
차가운 냉기로 뿌연 입김을 뿜으며 나지막하게 말하던 꼬마의 질린 눈과, 바로 자신이 귀신임을 알아버린 블루스 윌리스의 절망에, <디 아더스>의 죽어서도 목숨 거는 니콜 키드먼의 모성과 사랑에 오히려 소름이 돋았었다.
누가 그 영화들이 귀신 영화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동시에 누가 그 영화들이 단지 귀신 영화라고만 할 수 있나.
한국 영화와 외국 영화의 비교가 아님을 말해 두거니와 잘 만들어진 귀신 영화의 다양성과 감동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어린 시절엔 귀신 이야기나 영화를 보고 나면 곧잘 귀신꿈을 꾸었다.
무서운 영화보다 후속 꿈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그런 날 밤에는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젠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저절로 잠들지 않는다.
귀신꿈은 고사하고 다른 꿈도 꾸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늦도록 붙들고 있던 의식의 끄트머리에서 까무룩 줄을 놓고 꿈도 없이 잠시 죽었다 깨어난다.
모르겠다, 왜 꿈이 없는 잠을 자는지.
며칠 전, 더위와 피곤으로 왼눈 안쪽의 실핏줄이 터져 눈이 빨갛다.
종종 그런다. 언제나 허약한 왼쪽 눈이다.
좀 나아졌나 살피느라 눈알을 한쪽으로 몰아 거울 속의 나를 째려본다.
귀신이 따로 없다.
납량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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