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름을 싫어하는 여러 이유 중 단연 으뜸이 땀이다. 더우면 체온 조절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한다는 생물학적 구조야 알지만 이건 흘려도 너무 심하니 탈인 것이다.
친정, 즉 나의 혈육으로 말하자면 아버지 오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땀을 엄청 흘리는 체질이고 엄마와 언니는 그저 꼽꼽하게 배여 나오는 정도이다. 나도 엄마 편으로 끼워주지 그만 아버지 편으로 분류되어 '물팅이'가 되었다.
갓난이 시절부터 나는 여름엔 땀띠를 달고 살았다. 땀띠는 톡톡 쏘아댄다. 놀면서 긁적인 땀띠는 빨갛게 성이 나 부스럼처럼 커져버린 후 쉬이 낫지 않았다. 엄마는 여름이면 나를 마치 남자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깎아 되도록 머리카락이 이마나 목덜미를 덮지 못하게 하였는데, 덕분에 오빠의 항렬을 이어받은 머슴애 별명으로 여름 한 철 불리곤 헸다.
이마엔 언제나 뽀얗게 분칠이었다. 분칠된 얼굴도 온 몸의 피부도 분칠 못지 않게 희었다. 이웃 어른들은 너무 흰 피부는 건강하지 못하여 저리 "헌디"(헐어 생기는 자리)가 잘 생기니 햇빛에 데리고 나가 태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할머니들은 태열이라 했다.
대여섯 살 무렵부터 엄마는 나를 햇살에 태우기 위해 모래밭이 좋은 해수욕장에 가셨다. 나와 엄마만 갔다. 엄마로선 나들이 아닌 치료의 목적이라 멀쩡한 언니와 오빠는 데리고 가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는 김에 다 데리고 갔더라면 나도 언니 오빠도 덜 심심하고 좋았을 것 아닌가. 경비를 아끼느라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해수욕장 갈 때의 간식거리는 포도와 햇고구마였다. 지금도 햇고구마가 여름에 나오면 문득 해수욕장 가던 길이 싸악 스쳐간다. 모래밭에서 찜질도 하고 물에서도 첨벙거리던 어느 날, 엄마와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 아줌마는 모래찜질 중이어서 산 같은 모래무덤 속에서 얼굴만 쏙 내 놓고 있었다. 배 위에 얹힌 모래는 호흡에 맞추어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모래에 눌려 숨가쁜 배는 계속 오르내리고, 드디어 모래가 조금 담긴 배꼽이 모래무덤의 한가운데 동그랗게 드러났다.
얘기 나누는 엄마 곁에서 얌전히 놀던 내가 말없이 일어나 그 배꼽을 내려다보다가 그만 손가락으로 꾸욱 찔렀다. 너무 재미있고 신기했기에 그랬다. 찜질하다 배꼽 찔린 아줌마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엄마는 민망해서 사과를 여러 번 했다. 혼자 말없이 놀지만 엉뚱한 짓 곧잘 한다고 엄마는 두고두고 이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햇살에 태워서가 아니라 자라면서 땀띠는 차츰 없어졌고 대신 땀을 엄청 흘렸다. 말랐던 처녀시절에도 땀나올 데가 어디 있냐고 남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였다. 특히 머리, 얼굴 부분에서 많이 흐른다. 만약 엎드려 걸레질이라도 할라치면 물방울이 그냥 바닥에 후두둑 소나기처럼 떨어진다. 한 끼 식사 준비를 가스불 앞에서 하면 눈썹에 땀이 매달려 눈앞이 흐리고 가슴으론 고랑을 이루며 흐른다. 앉아서 받아먹는 식구들이 미안해 하니 생색내긴 좋은 찬스다.
여름철 복장이야 대동소이 다 간편복이지만, 난 흰색 아니면 검은색이 대부분이다. 왜냐면 등이나 목 주변이 땀에 퍽 젖어도 남이 잘 눈치채지 못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 요즘 유행하는 하늘거리는 원피스나 블라우스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화장도 잘 할 수가 없다. 미처 화장대를 떠나기도 전에 콧등과 이마는 뭉개져 있고 기껏 부풀어 세운 머리는 힘없이 축축하다. 여름철 뽀샤시한 얼굴의 여인들을 보면 정말 부러워 죽을 판이다. 땀 철철 흘리는 화장한 얼굴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추한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맨얼굴로 일터로 갈 수 없질 않은가.
숙면도 당연히 힘들다. 밤새 뒤척이며 땀 흘리다 그만 일어나 앉는다. 그렇다고 선풍기나 에어컨을 좋아하진 더더욱 않으니 여름을 고스란히 '견디며' 보내는 것이다. 견디며 포기한다. 여름에 나를 맡겨버린다고 할까. 내어 준다고나 할까.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여름을 건너뛸 수 없으니, 아무리 힘이 센들 순리를 이길 수 없으니 여름 속에다 팽개쳐 둔다고나 할까. 흐르는 땀으로, 뜨거운 몸으로, 괴로운 불면으로, 그러다 어느새 여름이 나를 놓아줄 때까지....아, 그렇다. 여름이 나를 보내줄 때까지.
병석에 계신 친정엄마가 전화로 늙은 막내딸을 걱정한다.
"너 땀 많이 흘리지?"
"옴마, 여름에는 다 덥소. 걱정 마시이소."
"그래도 워낙 니는 물팅이라서 지칠라. 그늘로 댕겨라. 양산 쓰고."
"알았어요, 옴마나 더위에 조심하시이소."
"내야 머, 집에 있는 사람인데..."
병치레하는 나를 데리고 여름마다 해수욕장 가던 젊은 엄마가 지금도 나의 여름을 염려한다. 물팅이라서 내 눈에 물기가 질척인다. 단지 물팅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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