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비가 그치고 햇살이 따갑다.
비를 잔뜩 머금은 땅에서 뜨거운 김이 푹푹 오른다.
거대한 사우나 같다.
어제는 점심 모임이 있었다.
아들이 중학 1년일 때 논리 속독 학원에 1년 과정으로 보냈었다.
그때 어머니 교실이 3개월 열렸는데, 같이 그 과정을 들었던 엄마들이 헤어지기 아쉽다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엔 원장님까지 7명이었으나 사정상 2명이 빠지고 5명이다.
매번 5명의 일정을 맞추는 일도 어려웠다.
흔한 계모임도 하나 없는 나로선 유일한 "사회 생활 모임"인 셈이다.
태풍이 지나간 광안리 해변은 초록빛으로 아름다웠다.
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자 본격적인 안부가 시작되었다.
"잘 살았어요?"
"우리 봄에 보고 못 봤네요"
"원장님은 살이 빠졌어요, 얼굴이 홀쭉해요. 다이어트 하시나? "
살 빠진 원장님이 말했다.
"좀 아프기도 했고, 요즘 저녁에 걷기 많이 해요."
"역시 걷는 게 최고의 운동이에요. 겨울 파카 입고 밤에 한 바퀴 하면 2키로는 쑥 빠져요."
"학교 운동장 돌기는 정말 재미없어 못 해요. 오직 숫자만 세느라고 지겨워."
"동백섬은 돌기가 좋아, 경치도 좋고."
"운동도 경치 좋은 데서 해야 덜 지겨워요."
걷기와 살빠짐의 상관관계에 대한 정보들이 오고 간다.
운동이 아니라 입이 게을러 살 빠지는 나는 별 할 말이 없어 맞장구만 쳐준다.
언제부터 걷는 게 최고의 운동이 되어 버렸지?
인간의 원초적 기능이고 이동의 목적이었던 걷기 아닌가.
인간이란 걸어야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언제부터 '걷기'하면 운동으로만 여겨지나.
눈만 빠끔 내 놓고 두 팔을 직각으로 흔들며 폭풍 걷고 있는 '운동인'들의 행렬을 보았기 때문인가.
운동이란 의도성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고 그 '의도'란 뒤집어 말하면 결핍에 대한 인식이더란 말이다.
걷기가 결핍되어 운동으로 보충해야 하는 인간의 시대가 씁쓸하다.
생활 속에서 스스로 걷기를 거부해 놓고 따로 운동이나 헬스장에서 걷기를 찾는 형국이 되었다.
요즘 대한민국은 헬스 열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에서 헬스 소리만 들어도 이젠 지겹다.
건강은 물론 충분히 중요하다.
과거엔 그냥 '건강'만 하면 되었다.
여자들은 애 잘 낳고, 애들 병치레 없이 잘 키우면 그만이고, 남자들은 적당한 '인격'과 밤에 마누라 궁둥이 잘 두드려 주면 되었다.
병치레만 하지 않으면 '건강'한 것이니 더 바랄 게 없다는 말이다.
보는 눈이 고급으로 변한 요즘엔 건강 플러스 몸매이다.
건강을 챙기면서 동시에 몸짱과 그노무 S라인도 만들어야 한다.
소문자 s는 고사하고 D형 몸매의 우리들에겐 치명적인 현실이다.
여자들에겐 잘 생기지도 않는 근육 만들어 탄탄해야 하고, 요가로 몸매 교정하느라 이리 꼬고 저리 비튼다.
요가가 몸매와 상관없이 단지 건강해지기만 한다면 여성들이 다른 방법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남자는 임금님을 배에 새기며 역삼각형을 향해 매진한다.
두툼한 뱃살은 '인격'이란 명예 대신 '햄'으로 전락한다.
젊은이들은 쫄티를 보며 꿈을 키운다.
그들은 헬스와 수영, 요가를 한 후 차(!!!) 타고 집으로 와서 소파에 누워 쉬며 왜 살이 안 빠지나, 다른 운동 더 해야 하나 심란해 한다. 마트와 시장, 아이 학교에 잠시 가며 차를 몰고 간다.
걷기는 러닝 머신 위에서 실현되었다.
문득 아들이 어릴 때 생각이 났다.
녀석은 워낙 허약해서 성장 과정이 늦되었다.
돌이 지나고 한참이 되어도 혼자 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핑핑 날아 다녀도 부족한 개월 수에 네 발로 불불 기어다니는 손자를 친정 엄마는 무척 염려하셨는데, 아버지는 대수롭잖게 한마디로 끝내 주셨다.
"지가 사람 새낀데 안 걷고 우짤끼고, 기다리모 설마 걷겠지."
기다리니 과연 직립하여 보행하였다.
이건 어떨까.
원시성을 몽땅 잃지 않기.
인간으로서 단순하지만 가장 소중한 Nature를 문명에게 다 빼앗기지 않기.
촌스러움을 부끄러워 않고 간직하기.
그렇다면 회복을 위한 고의적 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선 나부터도 몇 년 전부터, 바쁘지 않으면 일부러 좀 멀다 싶은 거리를 걸어가는 경우가 잦아졌다.
운동하는 것을 좀 많이 싫어하므로 운동하자 작심하고 걷지는 않는다.
아마 운동이라 여겼으면 단 한 번도 걷지 못 했을 것이다.
그냥 이것저것 기웃대기도 하며 털레털레 내 맘대로 걷는다.
급하면 속보하고 아니면 보통이다.
골똘히 생각하며 걷기도 하고 슬프고 쓸쓸해서 걷기도 한다.
바람이 좋아 걷기도 하고 술 깨려고 걷기도 한다.
사람 사이 휩쓸리고 싶어 걷기도 하고 사람이 싫어 걷기도 한다.
가끔은 내가 인간인 것이 행복하여 발걸음 가볍게 걷기도 한다.
이럴 땐 나에게 차가 없다는, 앞으로도 가질 뜻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다.
해수욕장 개장을 하였으나 그간의 기후로 해변은 한산하다.
오늘 같은 무더위가 주말까지 간다면 주말엔 사람들로 넘쳐날 바다이다.
세 시간 동안 뭉개고 앉아 충분히 수다를 떤 우리들은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돌아 왔다.
아무도 이 땡볕 속에서라도 바닷가를 걸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지 않았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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