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배가 안 고프다.
최근에 다시 식욕이 없어졌다. 지난 겨울에서 봄까지 식욕이 너무나 없어서 체중도 줄고 그랬다. 4월이 지나며 대충 회복이 된 듯했는데 여름 들어서면서 다시 식욕은 멀리 도망가는 중이다. 원래 여름을 무지 타서 기진맥진하지만, 도망갈 식욕이란 애초에 없었다는 편이 맞다.
T.v 나 여러 블로그에서 많은 음식을 보여준다. 먹음직스럽고 푸짐하고 따뜻하다. 맛있게 보인다. 그러나 맛있게 "보인다"일 뿐, "먹고 싶다."가 생기지 않는다. 먹음직스런 객체로 인식할 뿐 내 뇌가 자극되어 텅 빈 위장을 꼬르륵거리게 하지 못한다.
배가 등에 쫙 들러붙어 있다. 당연히 배가 고파 허덕거려야 하는데도 밥을 먹어야지 하는 생각이 일지 않는다. 어떤 때는 밥을 잊어버리고 하루종일 굶고 있다. 왜 이리 기운이 없지? 하다가 한 끼도 정상적인 밥을 안 먹었다는 사실을 문득 자각한다.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파야 하는데 지치기만 할 뿐 왜 불같은 식욕이 안 일어날까.
대화도 자꾸 해야 또 할 말이 생기듯이 먹는 것도 자주 먹어줘야 위장이 신호를 보내올 것인데, 용불용설을 떠오르게 한다. 설령 먹고 싶은 음식이 떠 올라도 다른 것으로 일단 위장이 차 버리면 아까 그 음식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한 친구는, 배가 불러도 아주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면 더 먹어진다는데, 누가 이상한지 모르겠다.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엄청 써야 하는 나는 죽지 않고 하루를 지탱하기 위해 최소량의 음식은 먹어야 한다. 주로 그것은 점심 식사이기 쉽다. 힘들게 밥이든 면이든 빵이든 먹는다. 자발적인 식욕이 없다는 것일 뿐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어서, 먹는 자리에 앉으면 내 몫은 다 먹는다. 그냥 먹는다.
밥 달라 하는 아들이 곁에 없었다면 내 사인은 분명 아사, 혹은 영양실조일 것이다. 아들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다만 내가 먹고 싶은 게 많으면 음식을 이것저것 장만할텐데, 그러지 않아서 아들에게 미안하다.
慾이란 모름지기 사람이 살아가며 가장 필요한 활력소, 영양소가 아니겠는가. 지나치면 화를 부르겠지만 이렇게 결핍되어도 화를 부르긴 매일반이다. 간기능 검사와 몇 가지 기본적인 검사를 위해 한 드럼통의 피를 뽑고 나니 아깝다. 몇일 분 먹어 만든 핀데....서툰 간호사 덕에 바늘 들어갔다 나온 주변이 시퍼렇다. 혹시 알콜성 간기능 저하라고 나오면 우짜꼬 하는 제발저림성 걱정이 살짝 들다 만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고독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는데, 고독은 식욕 부진에 이르고 식욕 부진은 영양실조에 이르고 영양실조는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ㅡ이렇게 해석되는 요즈음이다.
2.수박
이런 나를 여름 내내 연명하게 해 주는 건 우습게도 수박이다. 덥고 지쳐 집에 오면 아무 일도 하기 싫고 오직 기절만 하고 싶을 때, 차고 달콤한 수박을 한 조각 입에 넣는 순간, 기진했던 세포가 짜르르 일어난다. 배 부르도록 먹고 나야 비로소 정신이 좀 차려지니 어른답지 못한 것 같다.
수박이 떨어지면 조급함마저 생긴다. 한 입 크기 사각으로 잘라 큰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면 아들도 나도 들며나며 먹는다. 하지만 수박으로 배를 채우니 밥 들어갈 배가 따로 없는 나는 저녁이 수박이기 일쑤다. 오줌 몇 번이면 흔적도 없지만 뭐 전혀 영양소가 없기야 할라고, 위로한다.
속 다르고 겉 다른 수박 같은 인간은 되지 말라지만, 나에겐 고마운 여름철 링거다. 수박 사 먹는 것도 일거리다. 무겁게 사다 날라야 하지, 장마에 껍질 수분 제거해서 배출해야지, 보통 정성으로 못 한다.
오늘은 수박이 떨어졌다. 퇴근 때 사 들고 오기엔 기운이 딸려 내일 손수레 끌고 가서 큰넘을 사야겠다. 하여 오늘은 수박을 굶고 글을 손 떨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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