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우가 있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으로 순간 멍해질 때 말이다.
얼마 전 서점에서 소설을 뒤적이다가, 뒤통수 맞은 듯 한 일본소설을 기억해 냈다.
아, 그래, 그 이야기가 있었지, <만가>....
한 시절 수없이 되풀이 읽곤 했었는데 어쩜 이리 절벽처럼 잊고 있었을까.
얼른 집으로 가 그 책을 확인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돌아오자마자 책장을 다 뒤졌다.
보이지 않았다.
왜 없지?
내가 버렸을 리는 절대로 없는데, 이사 몇 번에 딸려 나갔나?
이젠 출판도 안될 텐데, 영영 그만인가.
그 책을 다시 못 본다는 사실이 참으로 큰 상실감을 주었다.
지난 주, 친정집 거실 귀퉁이에 책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혹시 건질 책이라도 있나 뒤적이던 나는 오오, 반가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없어졌다 여겼던 다 떨어진 문고판 <만가>가 거기 있었다.
하라다 야스꼬의 <挽歌(만가)>1960년版, 일본 전후문학의 베스트 셀러였다.
하긴 처음부터 아버지의 책이었으니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왜 내 기억에는 결혼하여 친정을 떠날 때 그 책을 가져왔던 것 같을까. 기억은 믿을 게 못 되는 모양이다
22세쯤의 "나" 레이꼬.
관절강직으로 왼쪽팔이 부자유스러운 레이꼬는 어느날 소풍나온 강아지에게 물림으로써 강아지 주인인 한 남자를 만난다.
37,8세의 건축가, 가쓰라기.
가쓰라기상.
이 소설은 내가 처음 읽은 일본소설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버지 책꽂이엔 일본문학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만가>를 최초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순전히 가쓰라기상의 환상때문이다.
내가 여자어른이 되어서 연애를 한다면 이런 남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륜에 빠진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제외하고 말이다.
가쓰라기, 하고 나직이 부르는 것 만으로 수십 년 전의 그는 내 곁에 서 있질 않은가.
손가락에 잉크를 묻힌 모습으로.
....남자가 가까이 오자 슬몃 일어섰다. 회색 카디간을 입은 남자는 노타이로 좀 큰 키다. "아프십니까?"하고 남자는 내 곁에 와서 물었다.
남자의 음성은 탁음은 없었지만 낮았다. 그 음성에는 자신의 개가 나를 깨물은 것에 대한 마음의 당황함이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의 첫 만남인데, 가쓰라기에 대한 묘사는 이후에도 상당히 객관적이다.
그는 초록색 점퍼를 입고 짚차를 몰아 현장으로 가는 건축설계사다.
골똘히 생각할 땐 연필로 이마를 톡톡 두드린다.
레이꼬의 마음을 알면서도 냉정히 대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배어져 나오는 그리운 마음들,
즐기기 위한 가벼운 사랑은 아니었다.
정열의 깊음을 알기에 절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아내의 외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투적인 불화는 그려지지 않았다.
레이꼬의 사랑도 아름다웠다.
아내 있는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철없는 소녀의 것으로 위장한다.
그녀는 우연히 가쓰라기 부인의 외도를 목격하나
부인의 품위와 따뜻함에 매혹되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부인을 미워하지 않았을 뿐더러 아줌마라 부르며 가까이 지내기까지 하였다.
그것이 레이꼬의 위선이나 가식으로 묘사되진 않았다.
부인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 또한 레이꼬의 진실이었다.
가쓰라기의 부인이 자살을 했을 때 레이꼬는 말한다.
....불의의 사랑이 일층 아줌마를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었어요. 나는 아줌마가 좋았어요. 증오하려 해도, 질투하려 해도 아줌마는
내 마음을 꽉 붙들었어요. 나는 당신과 아줌마를 함께 사랑했던 것이에요.......하지만 내가 당신의 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줌마는 삶의 의지와 위안을 동시에 잃어버린 것이에요. 내가 아줌마를 사랑하였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단지 아줌마를 죽음에로
쫓아버린 셈이 되었어요.
부인이 죽자 그들의 만남도 멈추었다.
그것이 죽은 자에 대한 그들만의 만가였을까.
하지만 만남이 멈춘다고 사랑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일 년후 재회가 사랑의 완성은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여지가 충분했으므로.
쉽게 보면 그저 그렇고 그런 불륜 로맨스이다.
특이하게도 등장인물 아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으며 상대에의 집착은 애시당초 없었다.
간결하고 담백한 대화는 일본 특유의 것이라 치더라도 그 속엔 많은 고통의 함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비록 제도의 테두리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각각 다 눈물겹고 애잔했다.
< 이쯤되면 ㅅㄴㄹㅁ님의 고서수집 못지 않지요?>
건축설계사란 직업이 다 가쓰라기상처럼 매력적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은 같은 직업의 내 친정오빠 덕분이었다.
현실과의 괴리를 꿈에도 모르던 어린 나는 가쓰라기상이 참 멋있었다.
주인공의 전형적 묘사에 오글거리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건 내가 레이꼬와 가쓰라기의 나이를 훌쩍 지나버린 후에나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읽어보고 싶지 않다.
맑고 어린 세포로 읽었던 아프고도 달콤한 기억이 무너질까 아까워서다.
사랑은 유치해야 더 아름다운 법이니까.
내가 느낀 레이꼬와 가쓰라기는 그 시간 속에 그대로 있어야 제 구실을 한다.
낭만적 고통의 사랑, 가쓰라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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