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전, 아들은 고등학교 배정을 위한 지망서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2지망으로 B고등학교 적을까? 아니 왜애? 그 학교는 여태 언급도 안 했으면서 갑자기 왜? 음~시설이 무쟈게 좋다네. 짜슥아, 학교 시설이 대학 보내주나? 또 얼마나 먼데, 생각하는 거 좀 봐라. 학교는 내가 댕길 건데 엄마가 와 된다 안 된다 하노. 머시라! 그라믄 엄마는 뭐하는 존재라 말이고! 이웃집 아줌마냐?
아들은 꼭 B고등학교에 가겠다는 일념도 없이 즉흥적으로 해 본 말이었다. 왜냐면 그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실력이 괜찮은 학교인지도 모르고 단지 시설 좋다는 친구들의 말 몇 마디에 학교를 선택해 볼까 싶었던 것이다. 그 유아적 발상이 기가 찼다.
1지망은 집에서 가깝고 학생수가 많은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2지망이 문제였다. 집에서 다섯 번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D고등학교가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타학군에서 위장전입도 올 만큼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학교였다. 하지만 내신 9등급이 강화된 2008학년도 입시요강이 발표되자 수준이 높고 학생수가 적은 학교일수록 내신이 상대적으로 불리해졌다. 자연히 D고등학교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줄어들었지만 나는 일단 집에서 가깝고, 선생님들의 실력이 빵빵할 테니 2지망으로 D고등학교를 선택하자고 하였다.
스스로도 확신 없이 그냥 해 본 말이었다는 걸 속으론 인정하면서 단지 엄마의 반대에 맞서는 아들에 나는 더 화가 났다. 결국 엄마의 의견대로 지원서를 적어 입을 댓발이나 내밀고 등교하더니 곧 문자가 왔다. 친구들도 다 우리 동네 고등학교를 쓴다고, 저도 엄마 말대로 원서 쓴다고 말이다. 엄마의 백 마디보다 친구들의 한 마디가 더 중한 아들이다. 1, 2지망 중 어느 고등학교에 되어도 다 괜찮았다.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나가지만 않는다면.
오늘, 고등학교 배정을 받았다. 어디냐고? 이럴 수가....바로 그 B고등학교다. 1지망도 아니고 2지망도 아닌 전혀 엉뚱한 제 3의 학교에 배정이 된 것이다. 바로 코앞에 고등학교를 두고 다른 區의 학교로 3년을 다녀라는 것이다.
정말 열이 터졌다. 컴퓨터가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발뺌만 하면 될까. 그 區의 중3년 남학생 정원과 고1 신입생 정원을 잘 조절하고 학급수를 늘이면 안 되는 일인가. 오히려 올해 우리 區의 고등학교 학급수를 줄였다고 한다. 그러니 고스란히 학생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다.
운명이란 과거로부터 온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들은 원서 쓸 때 뜬금없이 B고등학교 갈까하고 나에게 말했었다. 그것이 운명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B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운명으로 만들었지 않은가.
배정 즉시 소집이 있어 위치도 모르는 학교로 택시 타고 갔다. 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시설 좋다"는 학교다. 한때 쟁쟁했던 정치인 선배가 거금을 던져 만든 시설이다. 오랜 명문교의 역사를 지녔으며 배출된 막강한 선배들이 전설처럼 있지만 그건 다 시험 쳐서 고교 입학하던 옛 영화이고, 지금은 보통 공립들이 그러하듯 사학의 열정에 밀려 수능시대를 기죽어 살아가는 학교다.
엄청 멀다. 우짜믄 좋노.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해야 할 판인지 답을 아직 못 찾았다. 그저 전화위복을 바라는 무능력한 엄마다. 녀석이 입방정을 좀 더 가까운 학교로 떨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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