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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혹은 기록

졸업 또 졸업

by 愛야 2007. 2. 24.

1. 졸업식. 2월 22일 목요일.

아들의 중학교 졸업식이다.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도 살랑거렸다. 아침에 아들에게 안내 프로그램을 보여달라고 하자 그제야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준다. 수상의 내용과 대표 학생들의 명단이 죽 있다. 학업 우수상, 공로상, 3년 개근상, 3년 정근상, 1년 개근상 등이 있다. 녀석은 아쉽게도 3년 정근상이다.

 

"근데 이 모범상이란 건 뭐냐? 너희 반에도 4명이나 받네."

"바로 나지."

"뭐시라? 니가 모범상...? 뭐에 모범적이었는데?"

"음, 모든 면에서 모범이었단 말이지."

"참 애매한 상이구나."

 

교복을 기부할 사람은 사복을 가지고 오랬다며 아들은 바지와 티셔츠를 챙겨 먼저 학교로 갔다. 나는 제발 기부하라고 했다. 그래야 교복을 훼손하는 세러머니도 삼갈 것이고 아직 짱짱한 교복도 활용될 것이다.

 

꽃다발은 하지 말자고 둘이 약속했다. 내 개인적 취향으로, 꽃 몇 송이에 잔뜩 포장만 부풀린 꽃다발을 매우 싫어하였다. 무엇보다 방금 둘이 집에서 얼굴 보다가 잠시 후 운동장에서 꽃다발을 서로 주고 받은 다음 그 꽃다발을 안고 길 건너 집으로 같이 돌아온다는 상황이 몹시 우습게 여겨졌다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아들도 그런 면에선 벌쭘해 할 뿐더러 꽃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녀석이라 큰 의미가 없는 형식치레일 게 뻔했다.

 

하지만 교문 앞의 장미꽃과 가족들 손에 들린 화려한 꽃다발을 보자 내 마음이 조금 변했다. 혹시 녀석이 말은 필요없어 하지만 서운하지 않을까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장미꽃을 딱 다섯 송이 사고, 화려한 장식 빼고 테잎으로 묶어만 주세요 했다. 너무나 초라한 꽃묶음이 되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교실로 가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녀석 앞에 꽃을 내밀었다. 친구들과 막 웃었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 엄마는 꽃 안 들고 올 거라고 미리 친구들에게 말했다나. 그러니 엄마가 배반한 셈이 된 것이다. 

 

 녀석은 아직 얼굴이 얼라 같아요.친구들은 의젓하구먼...쩝.

 

담임 선생님은 좋으신 분 같았다. 이 말의 뜻은 내가 담임을 처음 보았다는 것이다. 성의 없는 학부모라 찍히든 아니든 그것이 아이 인생에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쯤은 내가 더 잘 안다. 학교에 아이를 맡겨 두고 싶었다. 잘 하나 못 하나 감시하듯 엄마들이 학교와 교사를 방문해 댈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아이가 그런 엄마에게서 불만을 느낀다면 모르겠으나 녀석은 도무지 무감각한 성정이라 내가 큰 덕을 입은 셈이기도 했다.

 

담임은 잠시 눈물을 보였다. 아이들은 소리치고 환호하듯 담임을 달랜다. 거꾸로다 완전히. 여학생 몇몇은 담임 따라 울기도 한다. (분명 착한 녀석일꺼야)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목수는 대패로 나무를 깎는 시간보다 대패날을 가는 시간이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둘이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장미를 컵에 꽂고 이뿌지 했더니 그거 머하로 샀노, 꽃값 차라리 날 주지 한다. 나는 속으로, 나중에 여자 친구에게 꽃 사 주기만 해 봐라 별렀다. 우리는 졸업식 전통음식인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짜장면 먹는 녀석의 뒤통수를 한 번 쓱 쓰다듬는다. 외로운 뒤통수. 초등 학교 입학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쩌구 하는 감상은 혼자 목구멍 깊이 삼켰다.

 

2. 수료식. 2월 24일 토요일.

 

 

아들이 다니던 대학 부설 과학영재교육원의 수료식 날이다. 진정한 영재도 아닌데 단지 과학에 잠깐 혹하던 시절이 아들에게 있었다. 국립 대학 부설 과학 영재원에 합격할 때만 해도 나는 저 녀석이 뭐가 되려나 살짝 기대를 했다. 그러나 곧 꿈을 깼다. 녀석에겐 맹렬함도, 탐구심이나 치밀함도 없었고 무엇보다 과학을 근거로 하는 장래의 꿈이 없었다. 단지 한번 응시했는데 운좋게 걸렸을 뿐이엇다.

 

여름 겨울 방학의 일주일간 집중수업 기간에도 아침에 늦잠 못 자고 학교 간다며 툴툴거리며 마지 못해 출석했다. 한 달에 하루 출석 수업해서 영재교육이 된다고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과학에 대한 동기를 자극받을 순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과학 올림피아드나 경시, 과학고 등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중학교 내내 엉뚱하게 만화에만 열심이었다. 근근이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한 셈이었다. 그래도 지가 선택한 것이라 그만둔다는 말은 안 하였다.

 

1년 공부한 후 과학반 총 80명 중 심화 사사반을 20명만 뽑았다. 나머지 60명은 1년 수료로 끝났다. 놀랍게도 녀석은 20명 안에 들어 있었다. 엄마로서 심히 헷갈리게 되는 대목이다. 영 날나린가 싶다가도 의외의 결과를 보이기도 하니...다시 1년 동안 심화 사사하여 오늘 총 2년의 과정을 끝내고 수료를 한 것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히히 웃는 녀석.

 

많은 아이들이 과학고로 진학을 하였다. 녀석과 나란히 앉아 까불던 친구는 전국 유일한 과학 영재학교에 합격하였다.

과학 영재교, 과학고 진학생들이 부럽진 않았다. 내가 부러웠다면 그것은 그 아이들의 뚜렷한 목표의식과 노력이었다.

우리집 날나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 자라준 것도 기특하였다. 남들처럼 영재원에 넣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고액 학원이나 뒷바라지를 하지도 않았고 엄마가 차로 실어 모시지도 않았다. 맹세코 초등 입학 이후 단 한 번도 아이 책가방을 대신 챙겨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 나름의 철칙이었다. 시간표에 맞추어 책과 준비물을 가방에 꾸리는 것, 그것은 학생이 해야 하는 제 1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책을 안 갖고 갔다면 빌리든 벌을 받든 집으로 다시 달려오든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 결과로 얻는 것도 있을 것이다.

 

대학교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2년 동안 수고했다고 나는 칭찬 비슷하게 했다. 녀석은 별로 감사하게 듣지 않는 듯했다.

여전히 이어폰으로 귓구멍을 막고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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