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보다 손이 떨었다.
이상하였다. 실내는 춥지도 않았고, 별세의 소식을 들은 지도 10여 시간 지났으니 충격이랄 것도 없는데 향을 피우는 손이 부들거려 촛불 너울을 자꾸 비껴났다. 향 하나 겨우 꽂고, 잔 올리는 예는 그만 잊어 버렸다. 그리고 울었다. 저절로 섧고 아프게 울어졌다. 흐린 흑백사진 속의 외숙모는 웃으셨던가.
오랜 병고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지만 나는 변변히 문병도 못하였다. 친정엄마 역시 편찮으시다 보니 엄마를 간병하시는 아버지와 교대를 해 드린 후 서둘러 내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깜깜 밤중, 친정 도시의 외숙모를 뵈러 갈 틈이 없었다고 변명했다. 외숙모의 중환을 엄마에게 전해 듣고 염려만 했을 뿐 나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 뒤로 미루었다.
엄마와 외숙모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라기보다 편안한 자매 같았다. 외할머니의 허약함에 겁을 먹던 어린 엄마는 손위 올케가 생기자 든든하고 좋았다고 했다. 자신의 어머니보다 더 좋았다고 했다.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평생을 형아, 아우야 그리 살았다. 홀로 남은 우리 엄마는 먼저 간 올케를 편히 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큰 키의 구부정한 외숙모. 어린 시절 외갓집의 향수 속에는 외숙모의 소리 없이 입 벌려 웃는 모습이 보인다. 검은 머리를 쪽찌고 동그란 얼굴에 검은 피부의 외숙모가 우물가에서 들에 내 갈 국수를 삶아 씻고 있다. 옆에는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들여다 보고 앉은 우리에게 국수를 작게 말아 입에 넣어 준다. 그 희고 깨끗했던 국수는, 그 후 지금까지 국수를 즐기는 출발점이 되었다.
생각하니 외숙모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린, 외숙모가 있어 외갓집이 좋았다. 외숙모가 있어 외갓집이 외갓집다웠다. 그건 우리가 다 자라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외갓집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이미 외숙모는 길을 떠났음인데 나는 그녀가 없는 곳에서 손 떨며 그녀를 찾았다. 생전에 뵙지 못하여 엎드린 울음을 울었다.
#2. 한파
지난 주말부터 날씨가 많이 추웠다. 바람이 심한 도시이다. 종일 떠느라 긴장되었던 근육이 밤이 되자 아우성을 친다. 온몸의 지방층이 제법 두터운데도 추위를 작년보다 더 타는 것 같다.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지마는 아무 것도 글이 되어 일렬로 나와주질 않았다. 생각도 추위에 얼어 붙었다고 단정한다. 얼어붙은 수도꼭지에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 수도물 졸졸 나오게 하듯이 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흘러 나온다.
다만, 무엇으로 내 길을 열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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