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참 맑고 화창하네. 이제는 수능 한파도 없어진 모양이지. 지구 온난화가 다행인 경우가 다 있구나.
가을과 단풍은 북쪽에서부터 온다지. 가 볼까. 떠밀려온 가을이 더이상 갈 곳 없어 남쪽바다에 빠져 죽는 모양을 보러 가자.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 더 좋겠지. 東과 西로 기인 도시. 나는 주로 東에서 살았구나. 어쩐지 西는 낯설고 긴장이 돼. 하지만 달마도 西로 간다는데 나라고 못 갈 게 뭐 있어. 버스만 타면 되는데. 온다, 버스.
소란한 버스, 나는 버스가 좋아. 할머니 두 분이 왁자지껄 타네. 친구 사이인데 정류소 앞에서 만났나 봐.
"너 만날 줄 알았으면 괜히 하청했네"
"그러게, 하청하고 다시 같은 버스 타면 소용 없지?"
하청? 할머니들이 뭔 사업을 하시나 하청을 주게...잠시 후 나는 창으로 얼굴을 돌리고 크크 웃었어. 버스 내릴 때 교통 카드 찍는 "하차"였구나.

버스와 마을 버스를 번갈아 타고 낙동강을 넘어갔어. 아차, 을숙도 공원을 휙 지나가네. 내려서 보고 갈까? 아니, 해가 빠지기 전에 먼 곳부터 다녀오는 것이 현명하겠지. 다녀올 때 내려 보기로 하지. 그런데 이 버스를 내가 맞게 탄 거야?
이상한 곳에서 내렸어. 바다 옆 공단으로 가는 도로엔 질주하는 차들과 황량한 바람과 줄지어 늘어선 모텔들만 있었어. 새들도 없어. 이론상으론 강 하구엔 철새가 와 있어야 했는데 내가 위치를 잘못 찾았나 봐. 괜찮아, 어차피 작정한 곳도 없었잖아. 그냥 나선 길인데 이만하면 성공한 거야.

그래도 바다는 바로 코 앞에 있네. 길 위엔 바람이 부는데 바다는 잔잔했어. 두어 사람이 윈드 서핑을 하고 있구나. 갈대가 있고, 바다와 점점 가까워지는 중인 해가 아직 있어. 하지만 내가 너무 늦게 온 거야. 東에서 西로 오는 시간이 꽤 걸렸거든.
바람이 서서히 차갑네. 어라, 손끝이 얼음장 같은 걸 보니 제법 기온이 내리는구나. 얼른 돌아가자. 가을이 아직 여기까지 완전히 당도하지 않았나 봐. 저 가로수 푸른 잎들이 말해 주잖아. 다시 와야 할까. 언제? 겨울이 되기 전? 그건 너무 멀어. 여긴 버스 팻말도 없네. 손 번쩍 들면 세워준다고 아까 마을버스 아저씨가 말했지. 손 번쩍. 버스 섰다!
을숙도 공원에 잠시 들러 가자. 한때는 최대의 철새 도래지였다지. 개발과 철새들을 바꾸어 버린 바보 같은 사람들. 을숙도 안의 문화 센터, 조각 공원 보기는 생략할래. 철새 관찰하는 에코센터는 지금 보고 싶지만 문을 닫을 시간이잖아. 다시 와야 하는 이유가 점점 늘어나.
늦어 텅 빈 공원, 나 혼자 전망대에 있네. 전망대에서 보라는 강은 안 보고 오렌지빛 지는 해만 봐. 참 붉고 크구나. 빛을 거두어드리는 이때가 아니면 너를 언제 똑바로 마주 보나. 전성기를 지나 갈무리하는 해질녘 비로소 네가 둥글다는 걸 보여주네. 이제야 네 모습를 보여주네. 나는 보네. 사라지기 직전에야 나타나는 진실의 테두리. 그것이 만물의 원리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혼자 사진을 찍어. 전망대 출입구를 경비 아저씨가 잠가 버린지도 모르고 혼자 놀았네. 나를 발견하지 못한 아저씨가 실내로 통하는 출입구마저 잠갔다면 옥외 전망대서 내일 아침 일출까지 보는 일이 생길 뻔했어.

아무 본 것이 없구나. 가을보다 겨울에 가까운 풍경들, 철새도 없었어. 하지만 이젠 길이 익숙해. 숙제 한 듯이 마음이 편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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