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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장미꽃 여인

by 愛야 2007. 11. 24.

오늘은 놀토다. 놀토라는 것은 아들에게 해당되는 축복이고 나는 토요일보다 금요일이 더 행복하다. 금요일은 하루 종일 빈둥거릴 수 있다. 물론 노는 마음은 썩 편하지 않다. 부지런히 움직여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인데, 월~목으로 확 몰아도 될 만큼 스케줄이 단촐하니 입으로 밥이 제대로 들어갈지 의문이다.

 

하지만 밥은 나중 문제고 우선 홀가분한 마음에, 어제밤 늦게 술을 한 잔 하고 잤더니 오늘 얼굴은 훤한 달덩이다. 그것도 연못에 빠져 퉁퉁 불은 달덩이다. 이럴 때는 목욕탕으로 가는 게 좋다.

 

목욕탕 탈의실부터 탕 내부까지 디카로 찍어 올릴 수 있다면 하는 장난스런 생각이 갈 때마다 든다. 블로그 중독 증상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생생한 현장 리포트에 즐거워 할 것이다. 흠흠. 일부 사람들 뿐일랑가? 특히 Y염색체를 가진? 나는 벌거벗은 여자들 손에 맞아서 벌거벗고 순직할지 모른다. 디카를 움켜쥔 채.

 

내 시선이 사진 프레임이 되어 이리저리 둘러본다. 이상한 것은 그 사진이 조금도 야하거나 수치스럽게 떠오르지 않고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마냥 몽롱하고 뭉실거리는 살들이 다정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반신욕하는 저 젊은 할머니는 목욕탕에서 아예 사는지 갈 때마다 탕 모서리에 앉아 있다. 물론 내가 나올 때까지도 앉아 있다. 황토팩을 온 몸에 바르고 있는 여자는 흘러내리는 황토 때문에 마치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듯하다. 이제 젖가슴이 봉긋한 여학생은 너무 이쁘다. 딸 못 키워 본 나는 딸아이만 보면 이뻐 죽겠다. 엄마 따라온 대여섯 살 사내애는 여탕 출입의 시절을 평생토록 회상하게 될 것이다.

 

아, 그러다 돌아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오늘이 세 번째다. 그녀 옆엔 서너 살짜리 어린 딸이 통통한 궁둥이를 목욕 의자에 올려놓고 있다. 그녀는 아이 엄마답게 옆으로 퍼진 아줌마다. 그러나 결코 평범하진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어깨 뒤 오른쪽 견갑골엔 장미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법 큼직하다. 장미꽃은 흐릿한 분홍색이었다. 처음 그것을 우연히 보았을 때 나는 눈을 의심하며 고개를 홱 돌려 다시 보았었다. 곧이어 궁금증이 마구 솟았었다. 저것이 문신일까, 문신이라면 그 말로만 듣던 조폭 마누래? 아니면 단순히 패션용 스티커일까.(월드컵 문신 유행도 아니고...) 스티커라면 안보이는 부위에 왜?

 

스티커라면 첫 번째 만남 이후 이미 지워지거나 지워져가는 중이라야 했다. 여자들이 때를 얼마나 박박 미는지를 알면 특히 그렇다. 하지만 분홍 장미꽃은 그냥 그대로였다. 무엇보다 스티커였을 경우 아아 그 실망감이라니... 

 

나는 문신을 한 여자의 몸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문신한 여자 하면 영화 "조폭 마누라"의 용으로 도배된 등짝만 떠오른다. 어쩌면 이 평생 여자 목욕탕 다니면서 두어 번쯤은 문신을 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에는 전혀 없다. 인상 깊은 문신을 못 보았다는 말이다. 

 

여자들 문신은 작거나 크거나 간에 문신을 했다는 자체만으로 많은 이야기가 시사될 수 있다. 고정 관념이 아직 뿌리 깊은 우리나라에서 아무나 쉽게 몸에 문신을 하진 않느니만큼 그 살아온 전력이나 굴곡 등이 파노라마 되어 휙 지나가는 것이다. 남의 인생은 파란만장 할수록 더 멋져 보이니 호기심은 곧 이기심이 되어 그 장미꽃이 꼭 문신이기를 바랬다.

 

그녀에게 직접 이거 문신이냐고 물어보진 못했다. 그러고 싶은 걸 굳세게 참으면서 그녀 근처 샤워기로 가 샤워하는 척 그녀를 관찰했다. 혹 과거 분홍장미派였는데 손씻고 애나 키우면서 살아간다, 이런 스토리를 암시할 꼬투리가 발견될지 모른다.

 

그녀는 커다란 젖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자루처럼 푸짐하게 늘어져 있는 걸로 보아 딸아이를 통통하게 키워낸 일등 공신이었다. 흠, 수유하는 문신녀라. 그녀는 흰 살결과 쌍꺼풀 진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 몸집도 크고 살이 쪄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순하게 보이게 했다. 날카로운 눈매나 상처받은 어두운 표정도 없는 보통 여인이었다. 그녀의 어디에도 몸에 장미꽃을 한 땀 한 땀 수놓게 한 독한 여자의 흔적이 없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다리가 O형인 할머니 한 분이 어기적거리며 힘들게 출입문 쪽으로 가자 이 장미꽃 여인이 벌떡 일어나 얌전히 문을 열어드리고 목욕바구니를 내다 드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마음씨마저 친절하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높다니.

 

그렇다면 저건 그냥 스티커일까. 목욕이나 때밀이에도 변하지 않는 특수 스티커. 에잇, 김 빠져....나는 그녀가 마치 변심한 전직 조폭이기나 한 듯이 실망하는 것이었다. 우습다. 자신은 무서워 귀도 못 뚫는 주제에 남은 문신하기를 바래다니, 끌끌,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꿀 나이가 이젠 아니지.

 

하지만 문신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상상인가. 한때는 등에 장미꽃을 새길 만큼 무시무시한 삶을 살았던 그녀의 지금 모습을 보라. 어린 딸의 말랑말랑한 몸을 씻기고 비누칠 하며 행복하게 웃고 있다. 순하고 정화된 표정과 평범한 몸매, 이웃 어른을 섬기는 마음은 선량한 남편을 만난 덕분이리라. 남편을 만난 곳은....이런 히스토리가 엮어지는 것이다. ㅎㅎㅎㅎㅎ

 

아이구, 목욕탕에서 요딴 소설 쓰느라 정작 땀은 안 빼고 힘만 뺐다. 내가 자꾸 힐끔거리고 쳐다 본다고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진 말아야 할 텐데,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그녀 옆자리에 붙어 앉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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