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마다 중심가는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문제로 좁은 나라가 들끓는다. 그저께는 촛불을 든 군중들이 행진을 하고 있었다. 긴 행렬은 한 방향 차선을 다 차지하고 느리게 걸었고 전경들이 그 옆을 나란히 보조 맞추는 중이었다. 걷는 군중 몇 배의 전경이 뒤를 따랐다. 또 그 뒤에는 어마하게 밀린 차들이 서행 중이었다. 아마 차를 밀면서 가도 그보다 빠를 것이다. 반대 차선의 나야 아무 영향없이 그 구간을 지났지만 한숨이 나왔다. 집회를 어느 장소에 모여서 하면 좋을 텐데 저런 식으로 행진을 하니 또 다른 민폐를 유발하지 않나. 그넘의 소가 사람들을 잡는 중이다.
버스출입구 쪽으로 방향을 틀며 섰다. 내리려는 준비자세다. 출입문 곁 기둥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려는데 잡을 수가 없었다. 웬 긴 머리 아지매가 온몸을 던져 기둥을 휘감고 서 있다. 아니, 여러 사람의 안전을 위해 잡으려는 기둥인데 왜 지 혼자 차지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출입문 앞에서. 기둥과 아지매 사이 틈이 없어 들이밀지 못한 손을 어정쩡 들고 비틀대던 다른 승객이 나를 보더니 난처하게 웃는다. 이럴 때 우찌 하나? 나는 그 매너 없는 아지매를 아껴줄 생각 따위 없다. 아지매 파마머리가 감긴 기둥을 거머쥐었다. 물론 머리카락도 내 손가락 사이 함께 잡혔겠지. 그 여자는 머리카락 댕겨지자 몸을 화들짝 기둥에서 분리하더니 뒤돌아 나를 보았다. 나 또한 무표정하게 마주보았다. 나는 왜? 하는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한마디만 해 봐라, 훈계를 줄 테다... 속으로 뇌었는데 다행히 여자는 아무 소리를 않는다.
#2
이건 되고 저건 안되고의 경계가 없어지고 있다. 어느 것이든 다 가능하고 어느 것이든 다 타당하다.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도 내가 상대적 위치에 서면 가능한 일이 되기도 한다. 꼭같은 사건으로 A는 망하고 반대편의 B는 흥한다. 마음먹기 운운의 말이 아니다. 그저 삶의 아이러니다. 결국 이 세상에 절대적이란 게 어디 있을 것이냐. 예를 들면, 어느 날 내가 너무 피곤하여(혹은 너무 취하여 흐흐) 온몸을 버스 기둥에 지탱하였는데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 몇 올과 함께 기둥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수준 높은 철학을 한다고 속 좁은 내가 두리뭉실 너그러워지는 건 물론 아니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넌다. 조물조물 간단히 손으로 해도 될 보드라운 속옷도 세탁기에 던져 돌렸더니 흠이 생겼다. 살짝 아까워 속이 상하려 하다가 시들해진다. 이젠 물건 때문에 그다지 속상하진 않는다. 그럼 어떤 것이 중요하나? 정말 잘 모르겠다. 세상에 과연 중요로운 것이 있기나 하는지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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