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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래도 겨울이 좋다.

by 愛야 2008. 8. 6.
 
 

 

작년 여름에 나는 발찌를 잃어버렸었다. 가느다란 것이긴 해도 여름이면 맨발을 기분좋게 장식해 주곤 했는데 올여름은 발목이 영 허전했다.

 

어제 마트에 긴 김에 발찌를 기웃거렸다. 29,000이란 숫자를 보고 용기를 내어 점원에게 14k냐고 물었다. 점원이 그렇다고 하면서 그 아래 18k는 30만원대라고 한다. 뭐시라, 30만 원? 3만 원이 아니고? 그럼 내가 본 저것은...다시 보았더니 어느새 0이 하나 더 붙어 29,000 아닌 290,000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금값 올랐다는 건 알지만 보통 발찌는 실처럼 가느다란 것이라 그렇게 비싸다는 게 기가 찼다. 이제 내가 금으로 장신구를 하기란 글렀다 하면서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아무리 내 발목이 굵고 튼튼하기로서니 30만 원을 매달고 다니기엔 내공이 아직 약하다. 

 

잃어버린 발찌는 5만원 가량이었다는 기억인데(나는 산 물건의 값은 즉시 까묵는다) 몇 년 사이 금값이 그리 올랐다 말인가, 쳇. 이럴 줄 모르고 나는 금붙이를 너무 일찍 팔아먹었다.

 

아들이 7살이었던 11월이었다. 방바닥에서 싸늘한 냉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지는 제법 되었다. 보일러 기름통은 여름부터 계속 텅텅 비어 있었고 기름통을 채울 돈도 없었다. 아이는 추운지 더운지 모르고 그저 엄마만 있으면 잘 놀았다.

 

남쪽지방이라 11월도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나는 방에 이불과 요를 좍 깔아놓고 그 위에서 아이를 놀게 했다. 밤이면 두툼한 이불 아래서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잤다. 아침에 깨면 온몸이 뻣뻣하였다. 이불 바깥의 공기는 싸늘했고 방바닥을 디디는 발가락은 자꾸 오므려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추위는 어느날 아침 갑자기 손님처럼 온다. 그날은 체감온도가 달랐다. 기온에 민감한 나의 손끝과 발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미래가 두렵고 고독했던 에미는 말없이 놀고 있는 어린 아들에게 춥냐고 자꾸 확인했다. 기온은 이제 하루하루 내려갈 거고 겨울이 깊어질 일만 남았다. 

 

더 이상은 아이를 떨게 할 수 없었다기보다 내가 견딜 수 없었다. 실내에서 옷을 많이 껴입거나 양말을 신거나 하는 것은 기름을 아끼는 절약의 방법이지 아예 기름 없이 사는 방법은 못되었다. 더우기 나는 옷을 많이 입거나 양말을 신는 체질도 아니었다. 일단은 기름을 확보하는 게 급했다.

 

집에 돈으로 치환되는 것은 조금 남아 있던 금붙이가 다였다. 반지와 목걸이, 기념으로 남겨둔 아이의 돌반지 두어 개를 챙겼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까짓게 뭐라고, 새끼가 오돌오돌 떠는데 이까짓 금붙이가 뭐라고.

 

한번도 무언가를 팔아본 적이 없는 내가 금을 들고 집을 나섰다. IMF시절이라 금교환해 주는 곳이 곳곳에 있었음을 감사해 하며 나는 금을 주고 돈을 받았다. 지금의 저 발찌 하나도 안되는 값이었지만 커다란 기름통을 꽉 채우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든지... 그렇게 헐한 값에 마지막 금붙이를 없애버리고 나는 10년이 넘는 여지껏 단 한 번도 반지를 끼지도 원하지도 않았다.

 

내 것은 아깝지 않으나 아들의 돌반지는 하나 남겨둘 걸 싶다. 고지식한 성미가 지금보다 그땐 더해서, 외상으로 일단 기름을 넣고 돈이 마련되는 대로 주면 될 텐데 이 띨방한 아지매는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돈을 손에 쥐고서야 기름차를 불렀다. 몇년 단골 기름집이 그 정도 편의를 안 봐 주었겠냐 말이다. 아니면 주유소에서 기름을 몇 통만 사와서 급한 불을 꺼도 될 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방도도 있었는데 그저 아이를 안고 외로워만 하였다. 곧 죽어도 외상 달란 말을 할 줄 모르고 부모형제에게 손벌리기도 싫었다. 머리가 나쁘면 넉살이라도 있든가, 하하.

 

반지를 빼면 손가락의 하얀 줄이 반지가 존재했음을 알린다. 시나브로 바람과 햇살이 흔적을 없애가는 사이 마음에서도 사라지는 무엇이 있다. 반지가 주는 구속으로부터 멀어지며 그 자리에 자유로움이 온다. 약간은 허망하고 약간은 달콤한 포기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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