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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記

부스러記 18, 가지가지 다 한다

by 愛야 2020. 10. 28.

   2020. 9. 20. 일

아들에게 이번 추석은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할아버지 뵈러 가지 않는 게 옳을 듯하고, 그렇다면 제사도 없는데 굳이 움직일 필요 없다고 했다.

아들은 글쎄, 흐릿하게 대답하더니, 내가 확실하게 오지 말라고 하니 받아들였다.

야호, 명절음식 따위 없이 평소처럼 빈둥거릴 생각에 즐겁다.

 

  2020. 9. 22. 화

아들은 손자니까 그렇다 치고, 나는 아버지 엄마를 뵈러 명절 앞서 미리 다녀오기로 하였다.

주문했던 뉴케어 한 박스와 용돈을 준비하였다.

주문할 때 한 박스와 두 박스 사이에서 망설였는데, 두 박스 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한 박스 무게가 무려 6kg인 것을 물건 받고서야 알다니, 내가 이리 둔하다.

글치... 200ml×30=6000=6kg

아버지 집으로 바로 배송하려다가, 택배 받으러 나오시기 힘들까 봐 내가 가져다 드리려는 것이다.

 

다녀오는 마음은 언제나처럼 착잡하다.

하지만 자식은 남과 별반 다르지 않은 법, 숙제를 끝냈다는 홀가분함이 다음 방문까지 유효할 것이다. 

 

  2020. 10. 3. 토

아침 기상 후 평소대로 5개의 화분에게 인사를 하였다.

느리게 물 한 잔을 마시고, 커피도 마셨다.

휴대폰을 뒤적거리던 어느 순간, 명치 주변으로 '뚝' 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트림과 선하품과 통증이 마치 체한 것 같았다.(기상 후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나는 휴대폰을 팽개치고 다급하게 내 엄지손가락을 실로 묶었다.

셀프로 찔러 피를 보며, 얼마나 내가 급했는지 실감했다.

이 나이 먹도록 체했다고 손가락 따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체한 것은 아니었다.

체하면 두통이 극심하고 모두 게워내야 가라앉는 나의 전형적 증상이 없었다. 

 

곧,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통증이 왔다.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는 이상한 통증이 명치를 관통하여 야금야금 퍼졌다.

몸을 오그리고 누웠다.

내 몸통 깊은 곳에서 출발한 통증이 왼쪽 등과 왼쪽 옆구리에 느껴졌다.

등을 대고 누우면 통증의 진원지가 마치 지구 속 어딘가인 듯했다.

인대나 근육의 표피적인 통증이 아니라는 감각이었다.

이상한 것은 등짝 왼쪽만 욱신거렸다.

하필 연휴라 사흘을 생으로 혼자 앓았다.

펜잘이나 게보린 같은 일반 진통제는 1도 듣지 않는 신기한 경험.

 

  2020. 10. 6. 화

어제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조금 나아진 듯하길래 하루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밤새도록 뜨거운 통증을 느끼며 끙끙대다가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

등과 옆구리가 아프니 일단 단골 정형외과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의사는 말했다.

사진상 아무 이상이 없고, 증상을 들으니 대상포진 잠복기가 아닐까 합니다.

 

아아, 대상포진...!

왜 나는 그 생각을 까맣게 못했을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왼쪽 등과 옆구리를 간호사가 수색했지만 잠복기라 그런지 아직 수포는 없었다.

오직 지독히 아프기만 했다.

 

신기하였다.

일반 진통제가 1도 듣지 않던 통증이, 피부과에서 처방받은 약 한 봉에 사라졌다.

먹는 기능이 마비된 듯 먹고 싶지도 먹을 수도 없었는데, 호박죽 반 공기를 달게 먹었다.

이것은 가히 마법이 아닌가.

 

  2020. 10. 28. 수

그로부터 열흘 간 대상포진 치료제와 진통제를 먹었다.

치료제인 항바이러스제는 하루 한 번, 1주일간 복용했다.

그래서 약효가 떨어질 시간이 되면 등에 통증이 슬슬 올라오긴 해도 점차 그 간격이 길어졌다.

놀라웠던 약효의 신경 진통제는 항바이러스제보다 며칠 더 먹었다.

이 약들이 나의 위를 많이 손상시켰는지 모르겠다.

대상포진 치료 후 며칠이 지났을 때, 이번에는 심한 속쓰림으로 또 진땀을 흘려야 했다.

지금까지 죽과 위염 약을 먹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잠복기에 투약해서인지 끝까지 수포는 올라오지 않았고, 비교적 가볍게 앓은 셈이었다.

의사는, 드물긴 해도 종종 수포가 안 올라오기도 합니다, 했다. 

나 드문 사람?

그리고 남 하는 건 다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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