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베란다의 창으로 선선한 바람 한 줄기가 들어온 날이었어. 양파를 가지러 간 참이었지. 바람이 얼굴과 머리카락을 스치는 순간 멈칫했어. 와, 드디어 가을이 왔구나, 바람이 가벼워졌네. 나는 양파를 한 알 든 채로 창가에 서서 다음 바람을 기다렸지. 이미 9월이었거든.
하지만 나의 성급한 판단이었어. 그다음 바람은 없었어. 여러 번 말했다시피,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비가 있지. 바람이 아닌 비. 이 비 그치면 봄이, 가을이, 겨울이 올 것이라고 시인들도 다정하게 알려주었어. 비가 온다고 반드시 계절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계절이 바뀔 때는 반드시 비가 있지. 수학시간에 배운, 명제가 성립할 필요과 충분조건처럼 말이야.
결국 비가 왔어. 그동안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아 뜨거운 세상을 식히지 못했지. 밀렸던 몫까지 내리는 건지 이번에는 너무 한꺼번에 쏟아졌어. 그렇지, 세상에 고른 것이 어디 있을라고. 덕분에 단박 공기가 서늘해졌어.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가을이 되었지. 시간처럼 힘센 것이 또 있을까. 11월이 끝나갈 때 또 한차례의 비가 겨울을 데리고 올 거야. 올여름이 너무 더웠던 것처럼 겨울 또한 혹독하겠다는 예견을 뉴스에서 내 보내지만, 겨울이 온다는 것만으로 나는 마음이 평안해.
사실은 언젠가부터 겨울이 좀 두렵기도 해. 정서적으로는 겨울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나의 육신은 두려워하는 거지. 푹신한 겨울용 슬리퍼를 신고 싱크대 앞에 서면 더 그래. 먹는 것 마련도 싫고, 설거지는 더 싫어. 고무장갑을 끼지 않는 습관 탓이야. 추위에 모든 것이 다 딱딱해. 찬 공기를 가르며 거실로 방으로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내 옷 중 가장 두툼한 패딩을 입고 밖으로 나가곤 했어. 아, 아니, 겨울을 미리 그려볼 필요는 없어. 지금 이 순간은 가을이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그런데 엄마, 그거 알아? 내가 엄마의 아프기 시작했던 나이를 훌쩍 넘었더라고. 막내 머리가 엄마보다 더 허연 지가 오래야. 엊그제 꽃집 앞에서 국화 화분을 보았어. 소국을 좋아한 엄마 생각이 저절로 났어. 엄마가 좋아하던 색이 없어 그냥 왔지만 발견하면 꼭 사 올게. 요즘 엄마가 참 보고 싶네, 보고 싶어...... 엄마 생신이 든 찬란한 가을이라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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