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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천재를 그냥 두어라.

by 愛야 2005. 10. 29.

뉴스가 천재 송유근군이 8살의 나이로 某 대학 수시모집에 합격하였다고 알렸다.

그 입학허가의 기자회견장에서 천재 소년의 개발품인 공기정화기 시연을 보였다고 하더니,

이틀 후 그것은 모 중소기업제품으로 인터뷰과정의 오해에서 비롯된 헤프닝이라는 뒤집기 기사도 떴다.

 

천재는 무엇일까.

높은 지능과 창의성, 우리 아들이 20살이 되어도 못할 일을 지금 해내는 것, 그런 앞서 가는 것일까.

천재와 영재의 구별, 영재와 범재(?)의 구별법까지 씰데없이 제시하는 전문가도 있지만 그 기준과 시점의 보편타당성은 무언가.

 

과거 전국을 들었다 놓았던 천재들 대부분이 평범하게 혹은 오히려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출발의 깃대를 어디에다 꽂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천재의 앞에 펼쳐진 나머지 인생이다.

송유근은 안타깝게도 천재로서 요란하게 출발해 버렸으니 계속 천재의 이름표를 달고 가게 생겼다.

이렇게 온 매스컴과 국민이 사랑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감독하고 있는데, 어찌 천재로 자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에 비하면 우리 아들은 참으로 유리한 출발선에 서 있는 셈이다.

녀석은 명분은 "영재 비슷한" 입장이다.

여기서 "비슷한"의 의미는 결단코 영재가 아니라는데 있다.

다만 나라에서 그 질을 보장해 주는 지방국립대학의 과학영재교육원이라는 곳에 적을 두고 있으므로 그 타이틀만을 편취한 것이다.

 

나는 과학에 전혀 흥미를 못 느낀다.

대신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몹시 과학을 좋아하여 과학적 상식은 어미를 능가하였다.

별다른 특수교육도 못 시켰지만 곧잘 학교대표로 어딘가에 가서 상을 타 오곤 하더니 어찌어찌 영재교육원이라는 곳에 합격한 것이었다. 그래서 녀석에게 물었다.

"야, 영재교육원이 아니라, 영재 될라고 몸부림하는 교육원이제?"

내가 보기엔 영재 비슷한 아이도 없어 보인다.

 

평범의 범위란 얼마나 광활한가.

정말 뛰어나 영재 내지는 천재인가보다 하지만 기실은 대다수 '우수한 평범'일 뿐인 수준이더란 말이다.

녀석은 운 좋게 교육원에 적을 두고 나더니 오히려 과학에 대한 정열이 식은 듯 보였다.

정말 자신이 영재라고 착각한 걸까, 시험공부를 게을리 한 결과 학교 과학시험에서조차 만점을 못 받고 두어 개 틀리기를 몇 차례, 나는 녀석이 한때의 정열로 잠깐 과학에 미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이제 녀석은 너무나 유리한 고지를 획득한 셈이다.

조금만 성적이 올라도 그 노력을 가상히 칭송받을 게 확실하니, 천재 송유근보다 훨씬 편한 탄탄대로로 갈 수 있게 생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의 非영재성을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과목 중의 과목인 국어를 꼭 한두 개 틀리는 것이었다.

국어 못하는 영재는 진정한 영재일 리가 없다!!!!

이럴 수는 절대 없었다.

명색이 전직 국어선생의 자식으로 단 한 번도 국어 만점이 없다니 분명 나의 유전자에 누군가가 물 탔음이 명백하다.

"아들. 졸업 때까지 국어 만점...못 받겠제?"  나의 반어법을 이용한 격려를 녀석은 빈정거림으로 잘못 이해하고 발끈한다.

"지난 번 을매나 열심히 하더노, 나더러 우짜라꼬."

"그래...근데 엄마 학교 댕길 때는 '도주파'라는 것이 있었는데 요즘도 있는가?"

"도주파? 뭐 시험 피해서 도망가는 기가? "

"도서관 주변학파다"

"아, 나는 주변이 아니라 안에서 진짜 열심히 했다니까?"

이렇게 비유를 잘 간파하는 녀석이 어째서 수필과 시의 주제는 맨날 헛다리일까.

하기사 문학의 종착점은 人生으로 귀결되므로, 어린 녀석이 보기엔 다 아리송해 보일지도 모른다.

 

부모들은 자식의 비영재성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식의 평범함을 더 이상 부인해서는 안 되며, 아쉽지만 그 평범함에 승복해야 한다.

진짜 영재나 천재는 고자해서 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송유근식 교육법을 알아내고자 그들을 추적하고 신상을 검색하고 들쑤실 필요도 없다. 

어찌보면 우린 이미 다 영재다.

인간으로서 언어를 습득하고 두 발로 걷고 사랑과 이별을 하며 후회까지 하는 우리, 영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앞서 가는 것만이 천재가 아니라면 잘 가는 것 또한  천재다.

 

<천재 송유근을 내버려 두라>는 여론에 100% 동의한다.

황우석박사도 더 이상 이벤트장으로 끌어내지 말라는 말도 마음에 든다.

천재가 천재로 살 수 있도록 우리는 그저 그들을 잊어 주어야 한다. 

오직 돈 많은 투자가나 기업, 그리고 정부만은 그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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