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음력 열 여드레날은 친정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평일이라 며칠 앞당겨 주말에 친정엘 다녀오기로 했다.
마침 아버지가 다니시는 산악회의 정기 산행일이자 시산제를 지내는 날이라 아버지가 안 계신 하루 엄마를 대신 돌봐드릴 손이 필요했던 터여서 나는 겸사겸사 생색을 낼 참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당신의 생신에 산으로 가 버리신다.
엄마가 편찮으신 이후부터다.
니 엄마 저리 아픈데 내 생일이 무슨 필요있나, 그래도 엄마가 마음 아프면 안 되니 내 없이 너희들끼리 케잌 자르고 엄마께 대신 상 차려 드리면 된다...
엄마 생신도 , 아버지 생신도 다 엄마 몫인듯 하였다.
시산제, 해단식과 일련의 행사를(한잔 꺾는) 마쳐야 오실 줄 알았던 아버지는 의외로 술기운도 많이 없이 일찍 집으로 오셨다.
오후 2시 30분밖에 안 되어서 나는 속으로 반색을 하였다.
집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겠다, 야호.
아버지가 나에게 차비를 주신다.
생신이라 봉투에 넣어드린 얼마간의 용돈을 다시 받아오는 꼴이 된 셈이다.
"오늘은 내가 술기운이 있어 터미널까지 못 태워주겠다, 자 여기 택시비 더 얹어 준다아."
나는 사양도 안 하고 넙죽 받아드는 것도 모자라, 좋아 입이 찢어지는 시늉도 한다.
헤헤, 아부지 좀 더 쓰시지이 하면 아버지는 싱긋이 웃으며 야, 내가 요새 돈이 어딨냐, 하며 튕기신다.
나는 나이 먹어도 아버지의 막내딸이 분명하다.
명절 때 내가 아버지께 용돈을 드리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나에게 명절 잘 지내거라, 하시며 한 다발을 툭 던져 주셨던 시절에는(아..봄날...) 당당히 받음에 꺼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정년퇴임을 하시고 이어 엄마의 수술과 간병으로 11년이란 세월을 지나오면서 나도 사양하는 염치쯤은 차릴 줄 알게 되었다.
내가 이사를 하게 된 몇 해 전 여름날이었다.
이사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돌아오려는 날, 아버지는 나에게 돈을 내 놓으셨다.
"필요한 거 있으면 사라. 이사비용 많이 들테니.."
"아부지, 내가 새로 시집갑니꺼, 살림 장만하게? 암 것도 필요없어요."
나는 너무 속이 상하여 신경질을 팩 부리며, 돈을 밀쳐냈다.
내가 걱정없이 살고 있다면 이러실까 싶고 저 연세에 자식을 챙기게 만든 내가 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나는 멈칫하였다.
아버지가 나직하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가져 가거라...에미 애비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다는 증거.
너를 낳고 기르고 사랑하여, 지금껏 이토록 사랑하여 애타는 부모라는 증거.
세상에 아직 살아 있기에 자식를 쓰다듬어 줄 수 있는 부모라는 증거.
천형과도 같은, 그러나 너무나 행복한 증거.
죽기 전에 다 해 주고 싶은 부모라는 증거.
성질 부리던 입을 딱 다물게 해 버린 아버지의 한 마디에 나는 말없이 돈을 받아 들었다.
그리하여야 될 것만 같았다.
받아 든 내 손등 위로 그만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버렸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가 주시는 자잘한 차비도 감지덕지 하는 폼으로 받는다.
에헤이, 수입 잡았다, 해 가면서 좋아한다.
어버이날, 생신, 명절 등 이름붙은 날이야 좀 많은가, 그 때 부모님 용돈의 명분으로 되돌려 드리면 되는 일이니, 일단 즐거이 받아 든다.
철없는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어린 막내를 품에 안던 젊은 날의 모습과 다름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이후로는 "살아있다는 증거"를 크게 안 보여주셨다, 하하.
생각해 보면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듯하다.
내가 7살 때, 아버지는 인근 도시 **포 고등학교에 재직 중이셨던 탓에 집과 떨어져 혼자 하숙을 하고 계셨다.
어느 날 엄마가 옷가지를 챙겨 가셨는데, 아버지는 혼자 간 엄마에게 왜 꼬맹이를 안 데리고 왔느냐 화를 내셨다.
다음 주 집에 오신 아버지는 그만 나를 달랑 데리고 하숙집으로 가셨다.
남자 혼자 하숙하면서 어찌 아이를 건사할려고 그러셨는지, 용기있는 아버지이다.
아침에 낯선 아버지 하숙집에서 눈 뜨는 나는 참으로 쓸쓸하고 심심하였다.
언니도 오빠도 다 엄마하고 집에 있는데 나는 왜 여기 와 있나, 이런 심오한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우울했다는 기억은 분명하다. 하지만 워낙 말없이 혼자 잘 놀았던 탓에 나의 우울을 아무도 눈치채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잘 빗겨서 업고 학교로 출근하셨다.
아버지가 수업을 하시는 동안 나는 교무실 여기저기를 기웃대든지 의자를 빙빙 돌리든지 혼자 운동장에서 꼼지락거리며 놀았다.
매일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는 아버지를 동료들이 어찌 여겼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쯤이야 전혀 신경쓰지 않는 아버지셨다.
심심한 하루가 지나고 퇴근시간이 되면 아버지는 나를 업고 동료들과 술집으로 가셨다.
그 곳에서 나는 내 생애 최초의 멍게를 맛보았다.
"자, 맛있는 거다, 먹어 보라니까."
억지로 입에 넣어주는 아버지에게 도리질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물컹하고 찝찔한 그것을 입안에 머금고 있다가 술집 밖으로 나와 가만히 흙바닥에 뱉었었다.
돌아오던 밤거리의 바람소리를 아버지의 등에 업혀 무섭지 않게 들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나는 한 달쯤 머물렀던 기억인데 나중에 확인하니 일 주일 동안 뿐이었다.
엄마 품을 떠나 아버지하고만 놀기에는 일곱 살 기집애에게 그 일 주일이 무지 길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유달리 나를 잘 업어 주셨다.
특히 술을 드시고 오면, 마루에 서서 "아부지 다녀 오셨습니까아ㅡ"하고 외치는 우리 삼 남매 중 어린 나에게 꼭 등을 들이대셨다.
"막내야, 업혀라."
"흐응...싫은데..."
"업어야 한다, 얼마나 컸나. 업히거라."
나를 업고 비틀거리며 마당을 여러 바퀴 도는 아버지에게선 홍시 익은 냄새가 났었다.
다 큰 중학교 시절까지 업혔으니 나의 벌쭘함도 이해되지 않는가.
아버지는 나를 업고 비틀거리는 듯 했지만 기실 그것은 춤이었다.
업힌 나는 넘어질까, 패대기쳐질까 불안했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덩실덩실 춤이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신명.
내 등에 업힌 자식을 가늠해 보는 부모의 신명말이다.
제집을 향해 총총 떠나는 막내딸을 보느라 대문에 오랫동안 서 계시는 아버지가 아직도 등에 자식을 업고 추스리는 듯 보이는 것은, 오늘 당신에게서 그리운 옅은 홍시의 내음을 맡은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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