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늦가을, 저 산세베리아 화분을 사서 안고 밤거리를 지나 집으로 왔습니다.
바람이 유난히 불어 더 쓸쓸한 가을밤이었습니다.
가끔 물을 주었습니다.
가끔 햇빛을 주었습니다.
초록잎에 먼지가 도드라져도 애틋이 닦아주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가고, 꽃들로 요란 떨던 봄도 지났습니다.
오랜만에 물을 주륵 붓던 내 손이 화들짝 놀라 멈추었습니다.
새 촉이 나와 있었습니다.
화분 뒷쪽 편으로 숨어 외로이 솟고 있었습니다.
만난 지 7개월 만의 경이로운 出世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새끼를 치기 마련이고, 무릇 새끼란 다 기특하고 애닯습니다.
당연한 순리 앞에 제 탄복이 호들갑이라 해도 서운하지 않습니다만 겨우 세 개의 화분을 가진 사람으로선 황홀할 노릇입니다.
곁가지로 난다는 것.
튼실한 根本에 기대어 곁가지로 난다는 것.
큰 줄기를 벗어나 일탈의 개척을 위해 영양분을 소모시키는 저 여린 새 촉.
무모하게도 보입니다.
그러나 용기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소외에 머물기 위해 필요한 것이 용기와 포기가 아니던가요.
저 굳건한 원 줄기보다 반항처럼 한 귀퉁이에서 올라온 새 촉이 왜 이리 철학적이랍니까.
섬세한 식물이라면 섬세히 가꾸었을 테지요.
소홀히 대접해도 잘 견딘다는 꽃집 사장의 말에 힘입어 소홀히 대접했습니다.
저 촉은, 그런 나에게 나타나 이 세상 어떤 것도 소홀히 대접받을 것은 없다고 날카롭게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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