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끝났다고, 곧 여름이라고 한 지가 한 달이 지났어.
장마는 소강상태고 무더위도 아직은 달려들지 않네.
어제는 종일 안개가 뿌옇게 시가지를 덮고 있었어.
낮에 해가 쨍쨍하다고 말끔히 안개가 걷히는 게 아니데.
시내에서 올려다 본 먼 산이 뿌옇고 산에서 내려다 본 시내도 뿌옇기만 했어.
하늘에는 커다란 해가 안개 속에서 선명한 테두리를 보였어.
마치 보름달 같았지.
안개라는 한꺼풀 장막을 통하니 해도 달처럼 마주볼 수가 있었어.
바다로부터 밀려온 해무가 세상을 다 점령한 것이 틀림없었어.
가끔 그런 날이 있어.
밤이 되자 안개가 더욱 심해졌어.
재활용품을 버리고 나서 그대로 거리로 나왔어.
슬리퍼,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 집에 있던 차림이니 브래지어도 안 했어.
아무도 눈여겨 볼 나이가 아니라고, 밤이니 모를 거라고, 또 알면 어떻느냐고 중얼댔어.
근처 대학의 캠퍼스 안으로 들어 갔어.
나무가 흔들리고 하늘이 검었지.
안개는 온통 교정을 흘러 다니고 있었어.
오렌지빛 가로등은 더욱 몽환적이었어.
몽환.
현실을 살면서 몽환을 만나면 마음이 한없이 순해지지.
그 속에서까지 다투고 싶진 않아 마음을 풀어 놓는 거야.
저 안개처럼 경계가 없이 수목과 잔디와 건물과 사람들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거지.
내가 순수했던 시절을 나는 기억하나?
화내고 울고 감격하고 욕망을 가지고 사랑하던 나를 기억하나?
내가 자라 내가 되었으니 기억 세포 어딘가에 남아 있으려나?
어느날 덜컥 하고 작동되는 순간이 또 있을려나?
친구는 그것을 오작동이라 하여 우린 눈물 빠지게 웃었지만
아아 이 세상에 오작동이란 없어, 이유있는 작동만 작동되는 법이거든.
스스로 떠나보낸 외로움이 이럴 땐 슬며시 다가와 내 곁에 서네.
평범의 범주란 얼마나 넓은 것인데, 그만하면 내 인생이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건만
이 세상 나 홀로인 듯한 억울함이 가시질 않아.
기억 장치를 완전히 망가뜨려야 가능한 일일까.
순수에 대한, 행복에 대한, 꿈에 대한 기억들 말이야.
버릴 자신도, 다시 구축할 용기도 없는 경우엔 어찌 해야 하지?
재활용품처럼 버려도 버려도 같은 본질, 다른 모습으로 탄생되진 않을까?
집으로 돌아가자.
네온이 요란한 교문 밖 거리가 보였어.
이쪽과 저쪽이 보였어.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두고 가고 싶지 않은 안개를 두고 돌아가자.
교문을 나서자마자 횡단보도 불이 초록으로 바뀌는 게 보였어.
나는 뛰었지.
불이 영원히 교차하지 않을 것처럼, 저것이 마지막 초록불인 것처럼 말이야.
이게 현실인 거지.
주머니 속 돈으로 김밥을 사서 돌아온 집에는
재활용품을 너무 오래 버리는 어미를 궁금해 하지도 않은 아들이 꼬부리고 잠들어 있었어.
영어 72점 맞아 꾸중만 배불리 먹은 내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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