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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기

일인칭과 일인칭

by 愛야 2006. 8. 20.

 
#1. 愛야가 그녀를 보다.
"내가 중 2년이었을 때 말이야..."

그녀는 부드러운 손동작으로 앞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쓰다듬듯 쓸어 올린다.

이마엔 쓸어올릴 머리카락도 내려와 있지 않다.

언제나 단정히 앞머리를 모두 뒤로 넘겨 빗은 지 오래 되었다.

단지 저 동작은 진지하거나 지나간 추억을 말할 때 나타나는, 그녀 자신도 모르는 그녀의 버릇이다.

 

"우리 아버지는 나더러 중학교 졸업하면 공장 가서 돈을 벌라 하셨어. 가난한 형편에 언니는 몰라도 나까지 고등학교 못 보내주신다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이게 다가 아닐 것이다, 하느님이 내 앞에 무엇가 다른 것을 주셨을 것이다. 지금 이리 가난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그녀는 지금 인정받는 국어 교사이니 하느님이 그녀를 위해 남겨놓으신 그 무엇을 스스로 찾아낸 것이리라.

그녀는 행복할까.

그녀는 외롭다고 말한다.
"요즘 내 주변을 보면 동료는 있어도 친구가 없는 나이가 되었어.. 너도 멀리 있으니 정작 만나 이야기 하고 싶을 땐 참 사람이 그립단다. 문득 중 2년때의 그 생각이 떠올랐어. 이렇게 외로운 끝에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이게 다가 아닐 거야. 기다려 보는 거지...."

 

지금은 그녀가 성당에 열심히 다니고 있으니 공장으로 가지 않도록 해 주신 것보다 하느님의 빽이 더 커져 있다. 

언제나 따뜻하고 긍정적인 그녀.

남을 상처주지 않고 푸근하게 품을 줄 아는 그녀.

 

"드디어 퇴직 후 할 일을 생각해 냈다.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 아이들이 와서 하루종일 뒹굴대며 책 읽고 마당에서 새 모이도 줄 수 있는 그런 도서관 말이지...좋겠지?"

"마당에서 똥개 기르며 모여 살기로 한 프로젝트는 우째 되었노?"

"암만해도 좀 수정되어야 하겠지?"
우린 입 벌려 웃는다.

그녀에게 나는, 나에게 그녀는 그런 친구임을 확인하는 동안 창밖은 어두워져 갔다.

그녀보다 내가 더 외로운 존재임을, 가꾸어 갈 도서관의 꿈도 누렁이 뛰어놀 시골 마당도 없음을 그녀도 나도 안다.


#2. 그녀가 愛야를 보다.

"아무 일도 없다...."

愛야의 꺼칠한 얼굴은 지난 번보다 더 해 보인다.

문제가 뭐냐고, 너와 나 사이에 말하지 않는 게 무어냐고 해도 愛야는 쉬이 입을 열지 않는다.

지난 겨울부터 마음이 힘들어 보임이 역력한데도 愛야는 늘 아무 일이 없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는 세상을 홀로 사는 듯하다.

 

"그냥, 지난 겨울날, 모든 관계가 의미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냥저냥 흐르는 대로 버려두었던 것을 이젠 그만! 하며 정리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그 곳을 찾아 갔지"
愛야는 갑자기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눈을 했다.

새삼스러운 고통이 가슴을 찌르는 것일까.

하지만 愛야의 이야기엔 구체적인 이유가 등장하지 않는다.

걱정되어 묻는 나에게 언제나 저 정도의 경계선을 지키며 해 왔던 이야기이다.

 

"내가 그 도시를 찾아갔던 이유는 그 곳이 내 출발지이기 때문이야. 나 스스로 죄책감에 승복하고 인생을 던져버리게 하였던 출발지...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어.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고 많이 변해 버렸어. 돌아오는 역전에 서는 순간, 왜 그리 눈물이 쏟아지던지...지나는 사람들이 돌아볼 만큼 엉엉 눈물이 한없이 나더라."

 

愛야는 잠깐 말을 멈춘다.

겨울에 미처 다 흐르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아직도 愛야의 눈에 남아 있다.

나는 냅킨을 뽑아 내 눈도 닦는다.

이 빌어먹을 여자 덕에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었나.
"그리 아팠다는 것은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얘기지. 딱지 뜯어보니 그 밑에 상처가 아직 뻘겋게 있었단 말이지. 앙금 가라앉힌 흙탕물처럼 건드리기만 하면 뿌옇게 일어나더란 말이지. 그거 다시 가라앉히느라 그랬어. 이젠 괜찮아...모르지 아직도 가라앉혀 놓기만 한 것인지도."

 

우리는 맥주를 마시고 한없이 창밖을 보았다.

또 언제 만나나. 다음 겨울 방학이 되어서야 만날까.

오늘도 나는 愛야에게서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한 것같다.

아니, 愛야에게는 들려줘야 할 이유라는 게 애초에 없을지 모른다.

그녀의 우울이 거리를 느끼게 하는 건 지나친 우려일까.

#3 일인칭과 일인칭
나와 나는 각자의 둥지로 돌아가기 위해 밤늦은 터미널 앞에서 서로를 배웅했다.

만나는 동안 행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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