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꼭 장을 봐야지 벼른 지 일 주일 되었다.
막상 저녁무렵 시장 갈 시간이 되면 딱이 사야 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하는 진행표가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살 것이 없는 것이다.
감자는 그저 감자, 호박은 그저 호박이다.
감자가 감자조림으로, 호박이 나물이나 부침개로 떠오르지 않으니, 낙제 주부이다.
내가 낙제 주부인 것은 아들 외엔 잘 모르는 비밀이다.
집에 있는 대로 먹자, 먹는 게 무어 그리 대수라고, 중얼거리며 오늘도 시장을 포기했다.
냉장고에 뭐가 있나? ( 아래위 뒤적뒤적)
돼지고기가 있다.
볶자.
그런데 양파바구니가 비었고 당근도 없다. (왜 시장에 가면 이런 사야 할 것이 생각 안 나는지, 이젠 알고 싶지도 않다)
넣을 채소라곤 애호박과 파 한 줄기가 다다.
양파 없으면 맛 없을 텐데, 모르겠다, 맛없는 고기 한 번 먹는다고 죽지 않을 것이다.
양념한다.
마늘 듬뿍, 화학조미료는 쓰지 않는다.
부족한 채소를 보충할 요량으로 설탕 대신 꿀을 넣는다.
오옷, 넣는 순간 나는 실수라고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꿀은 윤기나게 채소와 고기를 적셨다.
잡화꿀이라 그런지 꿀 특유의 냄새가 너무 강했다.
실수했다고 느낀 것은 이 냄새 때문이다.
고기 볶으니 벌써 벌꿀 냄새가 진하게 올라온다.
아 싫다.
벌꿀 냄새를 숨겨보려고 시든 땡초를 썰어 넣는다, 소용 없었다.
그래, 김치 넣고 볶는 거다, 김치맛이 강하니까, 소용 없었다.
진간장을 더 넣는다, 소용없었다.
점점 이상한 음식이 되어 간다.
녹차잎에 마지막 기대를 해 본다.
뚜껑 덮어 김 올렸다가 여는 순간 훅, 벌꿀 냄새가 먼저 인사한다.
오메, 질기기도 해라.
누가 달콤한 꿀맛이라 했나.
끝에 묻어오는 쓴맛은 치명적인 걸.
이렇게 역한 질긴 꿀맛 앞에서 할 말이 없는 걸.
꿀맛이 호박과 땡초와 김치와 양념을 부질없이 만들어 버렸다.
맛 내려고 넣은 꿀이었지만 넣고나니 꿀이라서 싫었다.
돌아본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선택이 성급하였다.
한 번 넣고 나니 없애기 어렵다.
스밀 대로 스미고 녹을 대로 녹아서 안 된다.
아들에게 꿀 냄새 나느냐고 그 맛을 묻지 못했다.
모르기를 바래서다.
허니.
아들 이름을 소리나는 대로 부르면 이렇다.
가끔 놀리느라 내가 꾸울! 하고 엉기면 아들은 밀어내며 신경질 낸다.
엄마 '꿀' 하지마.
옹냐, 알것다, 그럼 '꿀.꿀' 해 줄께, 어라 두 번 하니 더 이상하다야?
유치무비하게 노는 에미는 아들과 정말 꿀맛처럼 행복하고 싶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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