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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그녀의 꿈

by 愛야 2007. 3. 9.

 

나는 이번 설에 시댁 안 갔어.

뭐긴 뭐겠어,신랑이 미워서 그렇지.

생각하니 괘씸하잖아.

필요할 때만 마누라고 큰며느리냐 말이야.

지가 날 마누라라고 생각하면 이리 무관심할 수 있어?

아주 얄미워 죽겠는 인간이야.

 

ㅡ그녀는 남이 듣건 말건 스스로 흥분하여 언성이 높다.

   띵똥 벨소리 외엔 조용한 은행 안이다.

 

생활비 한 푼을 안 주면서 집에 오면 밥은 왜 당연히 먹는대?

생활비며 세금이며 아니 얼마나 돈 드는 일이 많아?

어떻게 꾸려가느냐고 묻지도 않아.

당연히 나 알아서 살겠지 하는 거야.

응?

몰라, 김해에서 일 하다가 또 다른 현장으로 간다네.

나한테 세세히 말도 안 해.

얼마를 버는지 얼마를 저축하는지, 허튼 돈을 쓰진 않는데 왜 의논을 안 하느냐 말이야.

물론 애들한테 등록금 하숙비를 보내느라 수고한 건 알지만 그건 그거고 서로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얼마 벌고 얼마의 여유가 있는지, 내가 알면 돈 들고 도망이라도 갈까 봐?

날 무시하는 거란 생각 안 들게 생겼어? 씨팔.

 

그녀는 욕도 잘한다.

   자연스러운 욕설에 깜짝 놀라면 실례일 거 같아서 아무렇지 않아 한다.

 

우린 이미 부부가 아니야.

남편은 현장 따라 이리저리 잘도 돌아 다녀.

동료들하고 숙소 정해서 지낸다 하니 잘 있겠지 뭐.

지난 가을엔 내가 한바탕 했어.

울고 불면서 내가 뭔 마누라냐, 이럴 바엔 찢어지자 했지.

내 벌어 내 먹을 바엔 나 혼자 사는 게 속 편하고 알차지 미쳤다고 내가 이러고 사냐?

십 원짜리 하나 안 내어 놓으면서 뻔뻔하게 반찬투정을 왜 하냐고.

어이 없어 죽겠더라니까.

그랬더니 그 달에 딱 30만원 주고는 고것으로 또 그만이야.

사내 쪼잔하고 지 돈 아까워 벌벌 떠는 거 증말 오만 정이 다 떨어져.

 

응, 큰애는 복학했고 둘째는 장교시험 봐서 이번에 임관했어.

장교 월급 받음시로 군복무하면 대학 등록금 모아 복학할 수 있다고 하네.

애들은 걱정 안 해.

그래 내가 애들 복은 있어, 공부 해라해라 한 번 안 하고 저절로 컸어.

 

ㅡ 띵똥, 105번 손님이 달려 간다.

 

설에 말이야.

이 인간이 전화로 설 앞앞날 집에 올 테니 둘째애 부대에서 나오면 함께 강릉 시댁에 가자네?

시댁 가서 동서도 없이 나 혼자 일 하게?

동서 미용실 하잖아.

명절 대목이라고 일하러 아예 안 와.

내가 뭐 지들 치닥거리하는 사람이여?

평소 안사람 대우 해 주고 그딴 소리 해도 갈지 말진데 딱 필요해지면 고때서야 전화하니 을마나 얄미워?

난 이번에 피곤해 못 가, 연휴 짧고 연휴 뒤 바로 출장 있어 했지.

흐흐 속이 다 시원하더라.

몰라, 시엄니하고 지들끼리 했겠지.

시엄니가 김치랑, 반찬이랑 잔뜩 보냈데, 잘 먹어줬지,

누군 입이 없어 못 먹고 쉴 줄 몰라 못 쉬어?

 

보고 싶긴...흥, 이제는 정도 없어야.

대학 나와 멀쩡한 직장 팽개치고 노가다 생활 벌써 몇 년째야?

어휴......옛날엔 뭐 그리 좋았는지, 참.

대학 첫 미팅에서 만났다고 전에 말했잖아.

화가 아무리 났다가도 남편 얼굴만 보면 그냥 헤벌레 풀어졌었는데

지금은 그 인간 얼굴 보면 안 나던 화도 막 솟구쳐.

 

혼자 밥 먹고 혼자 잠 자니 편하지, 편하고 말고.

하지만 이렇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살기 싫어.

나 그 인간 보란 듯이 바람피울 거야.

이번엔 꼭 바람피우고 말 거야, 에이씨.

 

ㅡ은행 용무도 없으면서 들어온 은행의 폭신한 의자에 앉아 그녀들은 자판기 커피 한잔과 오랜 수다 후 일어선다.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다.

   세상사에 비추어 놀라운 사실이 하나도 없으므로.

   그녀도 벌써 몇 년째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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