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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혹은 기록

장보기 해후

by 愛야 2008. 8. 23.


일 년만에 세 여자는 조우한다. 여름과 겨울, 두 번 꼭 만나자던 애초의 약속은 한 번으로 겨우 명을 이어간다. 365일 중 이틀도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일 년만에 만나도 어제 헤어진 듯한 끈끈함이 세 여자를 수십 년간 이어준다. 터미널을 벗어나자 길 건너편의 웅성거림이 목격된다. 이 터미널 동네에 사람이 들끓기 전부터 있어온 5일장날이라고 한다. 가는 날이 장날, 운이 좋았다.

 

 

세 여자는 실로 오랜만에 장구경을 하기로 한다. 장터로 들어선다. 한 여자가 국산깨를 사야겠다고 한다. 그 여자는 이미 들어서는 입구에서 생땅콩을 한 됫박 산 터이다. 첫 깨장사 앞에 이르러 국산인지를 살펴본다. 성급히 살 게 아니라 장을 좀 구경한 후 결정하자고 한 여자가 말린다. 나중에 깨를 사면 꼭 여기서 사겠다고 대단한 언약을 상인에게 준 후 세 여자는 앞으로 나간다. 장터의 끄트머리는 닭가게다. 오리 닭 오골계도 보인다. 날개 달린 짐승의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털도 날린다. 그 순간 어느 수탉이 높게 꼬끼오 다. 하루를 여는 새벽도 아니건만, 곧 닥칠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본능이 운다. 도살의 장소에서 듣는 '시작'의 그 목청이 생경스럽다. 닭장수가 사진 찍는 한 여자에게 투덜거린다. 그 여자는 못듣는 척하며 한 장 더 눌러준다. 복부의 지방은 괜히 두툼한 게 아니다. 다 배짱이다.

 

시골 밑반찬을 파는 곳에 오자 세 여자 중 두 여자가 환호한다. 두 여자는 타지에서 온 여자다. 두 여자는 된장에 박은 고추와 깻잎을 사야겠다고 한다. 아줌마의 본능이라니. 파는 사람이 빛 좋은 된장에 무쳐진 고추 하나를 삼 등분으로 잘라 맛을 보라고 권한다. 두 여자는 맛있다고, 하지만 지금 사서 들고 다니기 곤란하니 떠날 차시간에 맞추어 사러 오겠다고 약속을 또 한다. 이 도시에 사는 한 여자는 반찬에 별 흥미가 없다. 먹는 일이 시들한 여자다.

 

깨와 고추장아찌를 약속하고 세 여자는 택시를 타고 장터를 떠난다. 관광지 동네에 내려 햇살이 하얗게 내리쬐는 길을 걷는다. 세 여자는 점심과 수다를 위한 장소를 물색한다. 관광호텔 앞에서 주차를 관리하는 아저씨에게 묻는다. 타지에서 왔는데 이 근처 알려진 음식점이나 맛있는 집 없을까요? 세 여자는 정말 시골에서 보리쌀 팔아 놀러 온 여자들 같다. 어리숙하고 능청스럽다. 이젠 상대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에 굳이 구애받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예의나 질서를 벗어난 언행이 아니라면 고급스럽게 굴 필요도 없다. 아저씨는 자신의 경험범위 내에서 괜찮은 집을 추천한다. 복국집과 또 뭐, 주로 술로 쓰린 속을 푸는 경우라면 솔깃할 집들이다. 고맙습니다아 하고 세 여자는 그냥 칼국수집으로 간다.

 

어느 텅 빈 카페에서 세 여자는 시간을 보낸다. 자식 이야기, 남편 이야기, 직장 이야기, 이야기 사이 짬짬이 졸기도 한다. 커피를 마시고 팥빙수를 시킨다. 숟가락 세 개 주세요를 잊지 않는다. 해는 예정된 자신의 길을 그리며 넘어가는 중이다. 세 여자는 이젠 헤어질 차비를 한다. 헤어질 차비... 역순서로 세 여자는 진행한다. 택시를 타고 다시 장터로 간다. 약속했던 깨집에서 깨를 사고 밑반찬집에서 밑반찬을 산다. 꼭 그 집이 아니라도 괜찮지만 아까 자신이 한 말을 지킨다. 세 여자 다 그런 점이 닮았다. 이왕 산다면 흥정한 집에서 약속대로 사줘야 마음이 편하다. 돈 안되는 고지식함이다. 더 많이 주고 더 싼 집이 없는지 살펴볼 일이지.

 

닭집은 몇 시간만에 닭이 반으로 줄어 있다. 높이 울던 수탉은 목을 내놓고 팔려 갔을까. 그런데 이상하다. 그 심하던 닭똥 냄새가 없다. 아직 장이 파하지 않았으니 주인이 청소할 리도 없다. 냄새도 기억처럼 미세한 입자가 되어 떠난 것인가. 닭의 솜털, 닭똥, 그것들이 부유하고 있을 공기인데 아무런 냄새도 없다니. 

 

된장에 버무려진 고추와 깻잎과 깨와 땅콩을 싸들고 두 여자는 각각 떠난다. 언제나 어색한 이별의 찰라. 먼 길을 달려와 다시 되짚어 감을 기꺼이 하는 한 여자. 이웃 도시이지만 서울과 다를 바 없이 드물게 만나는 또 한 여자. 그리고 가장 볼품없이 이 도시에 사는 한 여자가 남는다. 쓸쓸하다. 떠난 두 여자들이 식탁에서 반찬통을 꺼내 놓을 때 남은 한 여자가 떠 오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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