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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詩

공백이 뚜렷하다 - 문인수

by 愛야 2013. 12. 9.

 

 

 

공백이 뚜렷하다    

 

                                     

      문인수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인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주일이, 한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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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국투자증권에 달력을 얻으러 가고 싶으나 고객이 아니라서 가지 못하겠다.

달력 자리는 바꾸어 봤자 새 달력인데, 얻을 곳은 암만 생각해도 금융권 아닌 약국이나 병원.

운 좋으면 쥐똥만 한 잔액의 농협에서 새해 달력을 얻을 수 있으려나.

머리를 감고 창밖을 보니 그새 비가 내려. 유리창이 울고 땅도 검어.

그래, 보송보송한 날 다 두고 하필 오늘 갈 필요 없잖아, 비에 핑계를 대네 그랴.

12월이 다 가도 덮을 수 없다면, 덮기 지겹다면, 그냥 문 닫고 드러눕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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