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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詩

너무 아픈 사랑 ㅡ 류근

by 愛야 2015. 9. 22.

 

 

 

 

 

너무 아픈 사랑

 

                               

                                                    류 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 없는 것

다만 사랑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류근(1966~)  경북 문경 출생. 2010년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 지성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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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제대 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썼다는 가사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다.

흠, 글쿠나.

김광석이 불러 대히트를 했으니 누가 행운인 거지?

 

그래서

성공을 위해 항상 장치되는 암울했던 시절이었다고?

시인이 될 자는 유행가 가사를 쓰면 안 된다고?

사랑, 그게 뭐라고 전생의 유서 운운이냐, 쳇.

나와 같은 姓 씨만 아니면 더 흥! 해 줄 텐데 이쯤해서 그만.

 

오늘은 3층 할머니의 고함이 늦도록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애를 먹이시나.

영감님이 몸이 불편하셔 시골에 가 계시고 할머니만 혼자 3층에 계셨더랬다.(시골에 가서 몸이 불편해졌는지 선과 후는 사실 모르겠다)

그러더니 얼마 전부터 전동 휠체어를 타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간간 보였다.

다시 집으로 모셔온 모양이다.

요양보호사도 방문한다.

할아버지 휠체어를 요양보호사가 밀고 병원 다녀오는 모습도 보였다.

 

할아버지가 오고 난 후 할머니의 신경질과 고함소리가 종종 온 아파트를 울렸다.

평소 얌전하고 예의 바르게 보이던 할머니였기에, 그렇게 알고 있었기에,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자신의 아픈 영감을 향해 악을 쓰거나 화낼 정도로 거세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마누라에게 지은 죄가 많은 거여.

아니면 할아버지 귀가 어두워져서 할머니가 소리치는 것일지도 몰라.

그것도 아니면 할머니는 원래 목청이 크셨나 봐.

아, 나는 되도록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구박하는 것이 아니게 하려고 애쓰는구나.

 

젊거나 늙거나

너무 아픈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난처한)은 한쪽의 고통을 담보로 하지. 

어쩌면 사랑은 인류에게 가능한 경지가 아닐 거야.

사랑이란 허구를 동서고금 끊임없이 정의하는 거만 봐도 알조야.

그것은 즉,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거든.

 

그래도 3층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면 좋겠다.

다만 할머니 목청이 본디부터 크셨다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내 병 든 엄마와 아부지도 이해해 드릴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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