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없이
ㅡ 안현미
1.
반투명의 창문 같은 19세기 해양지도를 들여다본다고 했다
패, 경, 옥, 겁, 붕, 만 이런 글자들을 읊조린다고도 했다
네 그림자는 네가 가진 새장 같은 거라 했다
누구나 제 그림자 하나쯤은 지닌 채 울먹이다 간다 했다, 生
2.
흑, 흑, 흑
야근해,가 아니라 야해, 라고 답하고 싶지만
나는 오늘도 야근해
뼈, 뼈, 뼈
아픈 불혹이야
3.
왜 자꾸 우는 것이냐?
밀린 일기를 쓰듯 밀린 마음을 기록하고 싶어요
다른 차원의 시간이 찾아올 수 있게
다른 얼굴의 마음이 찾아올 수 있게
4.
홈스쿨링을 하는 제주 소녀처럼 쓴다
'바다는 우리들의 다음 시간입니다'
안현미 시인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2001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곰곰> <이별의 재구성> <사랑은 어느 날 수리된다>. 신동엽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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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불혹이 아픈 나이라는 건 아닐 테지.
내가 아팠던 시절이 하필 불혹 근처였다는 뜻일 거야.
불혹이란, 진심으로 혹할 것을 알기에 미리 선수 친 말이야.
경계해야 했을 만큼 겁나게 아름다운 나이지.
아름다움이란 간혹 지뢰도 되니까.
근데, 시인은 뼈 아픈 불혹인가?
스쳐 간 시간은 부질없으니 잊기로 하고, 당장 오늘 7월이 내 앞으로 와서 코를 디민다.
한 해의 반이 접혔다.
6월은 뉴스 안에 갇혀 달달 볶인 기분이다.
사막에도 안 가고 사막체험을 했다.
불쑥불쑥 이너무 나라에 대한 분노로 머리까지 열이 뻗쳐 더욱 실감 난.
그래, 힘 없는 백성이 죄다.
그러나 백성이 또한 미.래.다.
어제 산 함민복 시집을 일단 던져두고 열무에 고추장 넣어 비볐다.
챔기름 한 방울로 화룡점정.
침샘 폭발하며 아제아제 아밀라아제, 3키로 감량은 언제 달성하나.
비 때문에 며칠 동안 공원 걷기와 훌라후프도 못 했다.
시 읽으며 금욕적 고행모드로 바싹 조이려 했으나 속물적 몸과 영혼이 공조를 안 한다.
더우기 여름철 열무 비빔밥은 절대 포기 안 되는 식성.
이 한 몸 터져나가는 수가 있어도.
"사랑도 없이" 견디는 많은 시간들.
혹 남은 사랑이 있다면 가능한 한 잘게, 나노로 쪼개어 야금야금 오래 누릴 일이다.
"다른 차원의 시간"과 "다른 얼굴의 마음"이 찾아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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