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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복수와 내조 사이

by 愛야 2019. 6. 5.

늦은 저녁을 먹고 공원으로 간다.

남 보기에는 운동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에겐 하루의 중요한 마침표다.

 

산책을 이미 마친 듯한 운동복 차림의 노부부가 공원 쪽에서 마주 걸어온다.

두 분 다 족히 임신 7개월 배와 땅딸한 체구를 가졌다.

할아버지가 앞서고 할머니는 두어 걸음 뒤다.

할아버지가 팥빙수 가게 앞에 멈추어 넓은 유리창 안을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몇 걸음 뒤의 할머니를 돌아보며 제안한다.

"우리 하나 시켜서 갈라 묵으까?"

할머니 0.5초 단칼에 답한다.

"나는 단것 안 좋아한다." (포스 대단하심)

여전히 팥빙수 창 앞을 떠나지 못하지만 할아버지는 두 번 조르지 않는다.

덤덤한 표정의 할머니는 팥빙수 가게 안을 일별도 않고 전방주시, 가던 길 간다.

 

그들을 스쳐 지나며 웃음을 참는다.

하나 시켜 나누어 먹자는 꾀를 낸 할아버지가 귀엽고 측은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단것 안 좋아하면 한 숟가락만 먹는 척하고 할아버지 다 드려도 되련만.

내키지 않아도 상대가 먹고 싶어 하면 함께 먹어주는 게 보통인데, 할머니는 자신의 취향에 충실하다.

어쩌면 양보나 배려 없었던 젊은 날의 할아버지에게 본때 나게 되갚아 주는 중일지도 모른다.

복수하자면 꽤 사항이 많을 세대이긴 하니까.

.

.

.

아닌가?

만약 할아버지 건강 때문에 단것을 향한 남편의 식탐을 차단한 거라면?

아, 뜻밖의 내조!

비만, 당뇨, 고혈압 등등 성인병을 두루 갖추기 충분한 연세로 보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모름지기 정확한 속사정을 모르고 섣불리 웃지 말지어다.

올해는 꼭 홈메이드 팥빙수를 먹어야지, 엉뚱한 결심을 했던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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