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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묵은 친구들

by 愛야 2005. 8. 16.

 

매일매일 너무 덥다.

바다물도  8월 15을 이후로 차가워져, 해수욕 인파가 준다는데 무더위는 조금도 물러날 줄 모른다.

그래도 어제는 참으로 행복했다.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30년 묵은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각자 인생을 굴곡있게 살아 내느라, 멀리 사는 J를 수 년동안 만나지 못하고 지냈었다

어느 날, S가 결단력 있게 말했다

"우리가 이제 북망산 갈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이리 안 만나고 전화만 할거고?

 안 된다, 여름 겨울방학 1년에 두 번은 꼭 보는 걸로 하자. 알았나! "

'북망산'의 등장에 우리는 덜컥 놀라서 S의 제안에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나이와 세월에 겸손해질 때였다.

 

주동자가 있어야 끌려가는, 소극적이고 무심한 나는 사실 내심 반가웠다.

그리하여  말이 나온 그해 여름부터 1년에 두 번 상봉해 온 지 3년이다.

가히 상봉이라 부를 만하다.

J 는 서울에, 나는 부산에, S는 고향도시에서 각각 흩어져 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린 항상 만날 날짜와 더불어 어디쯤에서 도킹할 것인가 의논했다.

주로 가운데 지점인 대전에서 만나곤 했는데, 그것 또한 설레는 일이었다.

가족을 떼어 버리고 오롯이 내 친구를 만나러 떠나는 것 아닌가.

돌아갈 차 시간까지 금쪽같이 주어진 수다는 언제나 안타깝고 짧았었다.

 

올해는 서울 사는 J가 부산으로 왔다, KTX 덕분에.

가장 바쁜 그녀이고 부산을 싫어하는 터라 나는 엄청 황송하다.

난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친구들을 맞기만 하면 되었다.

사실 가까이 사는 S와는 듬성듬성 만나고 전화 수다도 자주 한다.

이 연중 행사는 순전히 J를 보고잡은 우리들의 이벤트이기도 한 셈이다.

 

10년 만에 만나도 아무런 벽이 없는 우리들이다.

표정과 표현법과 손짓과 발짓과, 어떤 짓을 해도 아무런 부연설명이 필요없는 우리들이다.

상대에 대한 왜곡, 오해, 삐침, 비밀의 발설, 상처 주기, 다 우리들과는 상관 없는 말들이다.

친구라기보다 이젠 형제 같아진 친구들이다.

간이 배 밖에 나와 세상이 같잖게 여겨지던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추억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각자의 아픈 상처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린 그것들을 같이 가지고 간다.

너무 익숙해져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그 많은 것들을ㅡ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셋은 택시를 타고 광안리로 갔다.

바다를 볼 수 있는 카페가 일단 많다.

경상도 택시기사 아저씨다운 나라걱정, 비분강개를 들으며 우린 출발부터 택시가 떠나가라고 웃었다.

다행히 흐린 날씨 탓인지 해변이 붐비지 않았다.

J는 바싹 말랐어도 여전히 인라인을 타고 자전거를 밟고, 건강해 보였다.

J는 말이 별로 없다.

말을 해도 단답형이거나, 으례적인 응답처럼 보이는 때도 있다.

저 인간은 늘 그렇다.

어제 오늘 일도 아니건만 가끔 의구심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친다.

별 그립지도 않으면서 친구의 도리상 만나는 건 아닌지...

하하 뭐 상관없다.

옛날에도 제일 툴툴거리고 무뚝뚝했던 인간이라 , 나이들어 그나마 싹싹해진 셈이다.

그녀의 건조한 말뽄새 아래 숨어있는 순수한 마음을 우린 너무 잘 아니까 개의치 않는다.

 

맏언니같은 S, 항상 넉넉한 마음을 갖고 있다. 

우리들을 제일 잘 덮어준다.

S에게 마음을 털어 놓고 위로를 받고 나면, 괴로움도 대수롭잖은 일이 되어버린다.

여자 셋이 점심 먹고 차 마시며 <잠깐> 떠들고 나니 (계속 한 자리에서ㅎㅎ)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5시간이 휙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다음 겨울이나 되어야 얼굴을 볼 수 있겠지.

 

친구들을 다 보내고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온다.

꿈이었을까...

친구들이 꿈처럼 다녀 가고 난 이렇게 깨어났나.

나만 이리 헛헛할까.

아직 해야 할 말이 잔뜩 남았는데...친구들 앞에서 미처 울지도 못 했는데....

다음 겨울 그들을 만나 고백할 말이 벌써 내 마음 속에서 만들어졌다. 

너희들이 있어 그나마 내가 숨을 쉬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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