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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는 것이 병

by 愛야 2005. 8. 9.

   

아는 것이 병이 될 만큼 많이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 싫어 꼭 알려주고 싶은 경우가 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면 그만인 일인데 정의가 불끈 솟은 듯 화가 나는 것이다.

 

얼마 전, 홈쇼핑을 보고 있었다. 

잘 알려진 한 방송인이 (아마 성우일 것) 쇼호스트와 더불어 신나게 침구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 여자 성우는 화려한 언변과 수다,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 등으로 정작 진솔함을 전달하지 못해 보였다.

평소에도 종종 요설이 심하다 하고 느껴지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그만 나는 놀라운 소리를 들어 버렸다 !

 

"이 침구에 누벼진 무늬를 좀 보세요.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이런 전통문양을 아름답게 생활 속에 표현해 왔잖아요? 세종대왕께서 문 창살에서 한글을 본뜨신 것처럼요."

 

세상에나 ! 돌아가신 세종 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버얼떡 일어날 소리가 아닌가!

우리가 초등학교 코흘리개 시절에나 들었던 유언비어!

그녀는 그 오래된 유언비어를  아직도 유포시키고 있었다.

그것도 전국적으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게.....

한글의 창제원리는 학생이라면 다 알고 있을 터, 그녀는 문 창살의 개그를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혼자만 무식할 일이지, 왜 수 많은 고객을 함께 무지하게 만들려느냐.

용서가 안 되는 마음이었는데, 여느 때라면 혼자 픽 실소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사안이 사안인지라 모른 척해 주기 싫었다.

나는 순간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불 같이 화를 내리라, 마구 퍼 부으리라  결심했다.

상냥한 상담원은, 내 전화번호와 정보가 뜨는지  "안녕하십니까  ㅇㅇㅇ고객님"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뜨끔, 몇 번 구매했던 덕분에 내가 누군지 알아버렸구나.

순간 나는 격앙된 어조를 즉시 접대용으로 낮추었다.(웃는 얼굴에 침 못 뱉은 비겁함이여.)

 

"방금 방송 중에 여차저차한 멘트를 했는데, 그런 엉터리 정보를 전국적으로 말해서야 되겠냐. 더군다나 방송인이 말하면 많은 주부들이 믿을 텐데. 댁 홈쇼핑을 이용하는 고객으로서, 잘 하라는 뜻으로 전화했으니 꼭 전해라." 

말 하는 도중 흥분하여 언성을 다소 높히긴 했지만, 싹싹한 상담원 덕분에 진정하고(사실은 내가 누군지 들켰기 때문에) 격려성 멘트로 마무리한 후 전화를 놓았다.

 

전화를 끊고 3초 후, 나는 으하하 집이 떠나갈 듯 웃었다.

내 평생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수많은 자막의 오류, 옥의 티, 시청자를 바보로 여기는 제작 태도에 화가 난 적 많았지만 대다수 그렇듯이 나도 혼자 흥분하다 말곤 했다.

물론 홈쇼핑 방송이라 손쉽게 전화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몹시 통쾌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씁쓸한 이 마음은 무얼까.

나이들면 매사에 다 노엽고 못마땅해 잔소리가 많아진다는 말이 문득 떠 오름은 왜인가.

 

요즘도 그 여자 성우는 높은 목소리로 침이 마르게 홈쇼핑 물건을 칭찬하고 있다.

그 여자에게도 그날은 아는 것이 병이 되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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