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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기다리다.

by 愛야 2005. 12. 1.

12월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상점들엔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물건들로 가득하다.

머잖아 온 거리엔 캐롤이 울려퍼지고 산타들이 둥근 배를 신나게 흔들 것이다.

교인도 아닌데 크리스마스가 뭐람 하는 정체성의 갈등이 해마다 찾아오지만, 크리스마스는 그냥 축제라고 인식될 뿐이다.

축제엔 신나게 놀아야 하는 거라.

 

천안에 나의 외사촌 언니가 산다.

햇수로는 한 살이지만 엄밀하게 10개월 먼저 난 그녀를 한 번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처럼 사이좋게 자랐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때려치고 결혼하더니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가족 중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상황에서 다소 의외의 처신이라 할 수도 있었다.

외숙모를 비롯해 울엄마까지, 대부분 그 연세 여자들의 오랜 전통처럼 절에 쉬엄쉬엄 다니고 있었지만, 가족들 간의 종교적 탄압 내지 박해는 없는 깨인 집안이라 교회 다니는 것으로 나무라는 일은 없었다.

부모 자식간의 종교를 서로 인정해 준 덕분에 그녀는 지금껏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다.

정이 많고 솜씨도 좋은, 그야말로 마음 넉넉한 현모양처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전화가 와서 반갑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역시 마무리는 교회이야기로 몰아간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시련의 가운데에 서 있는데, 하느님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수 년째 나는 아마 그녀의 전도대상 1호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녀의 종교에 대해 부정이나 편견이 없듯이 동참의식도 또한 없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신념대로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나는 내 신념대로 아직 아무 것도 안 믿는다.

 

종교는 무엇이던가.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믿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은 곧 시공을 초월한 공통神이고, 공통善을 향해 가는 여러 통로이기도 하다.

형상화된 이미지가 하나님이든 알라든 부처든 마리아든 심지어 무당이든, 나는 대상에 가치를 두지 않기에 어떤 누구의 신앙이라도 타인을 상처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 자유를 인정한다.

영혼은 그 사람의 몫이고 권리이다.

종교적 논쟁도 싫어할 뿐더러 내 잣대로 그것을 왈가불가하는 일은 결코 없다.

내 보기엔 모두 도달점이 같으니 어느 것을 택해도 될 것이고, 또 어느 것을 택할 수 없어도 된다.

하지만 세상은 나와 다른 모양이다. 무엇 하나를 꼭 꼬집어 선택한 후 그 규율에 맞추어 열심히 실천하며 사는 것을 종교라 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항상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성격상 맹신도 안 되거니와 규율에 맞게는 더더욱 힘들다 못해 거의 불가능한 나머지 나이롱 신앙인으로 전락하고야 말 것이다.

나이롱 신앙인이 된 자신을 보는 괴로움도 만만치 않을 터이고 결국 흐지부지 두 손 드는 결과밖에 더 있겠는가.

 

종교로 치자면 나는 사실 성모마리아에게 빚이 있다.

것도 삼 세 번이나.

2.75kg이라는 플라이급으로 태어난 아들은 2주일 만에 신생아 패혈증이란 무시무시한 병으로 입원을 하였다. 

신생아입원이란 다 알다시피 어미가 해 줄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살지 죽을지, 아들은 뼈와 가죽만 남은 사람같지 않은 모습으로 주사바늘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심한 상태가 아니라는 의사의 말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들을 신생아실에 입원시키고 돌아오던 날, 참 엄청 울었다.

베개만 동그마니 남아있는 아기이부자리가 슬프고, 운명을 하늘에 맡기라는 울아버지의 말이 야속해서 울었다.

내 뱃속에도, 곁에도 없는 아기의 흔적이 믿기지 않아서 울었다.


산후조리는 고사하고 아침 저녁으로 면회를 다니던 한여름 어느 날, 오래된 성당의 마당가에 서 있던 성모상이 떠올랐다.

병원이름이 성모병원이어서 그랬을까, 저 위에 계신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여야 어미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하는 거라 생각되었다.

간절한 말이 머리속으로 떠 다녔건만 성당 화단의 한 귀퉁이에 앉은 나는 한 마디도 구체화된 문장으로 기도하지 못 했다.

그저 성모상을 멍하니 보며 아기를 살려 주세요, 했을 뿐이었다.

성모께서 살려 주었는지 의사가 살려 주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들은 15살 산만발랄한 사춘기가 되어 부실하게 낳은 어미에게 복수하듯이 속을 뒤집어 놓곤 한다. 

 

맛들인 나는 그 후 염치없게도 두 번이나 더 성모상을 보러 갔었다.

역시 마당가에 앉아 그저 멀거니 보고만 왔었는데, 깨닫고 보니 기도문이랄까 하는 형식을 모르는고로 아무 말을 못했지 싶다.

청을 들어주면 제가 성당에 다니겠습니다, 하고 조건기도를 한 건 아니지만, 살려달라 부탁을 했으면 그 자체로 이미 빚을 진 셈이다.

그러니 내가 만약 종교를 가진다면 성당에 다녀야 마땅하다.

물론 집주변에 성당이 아니라 절이 있었다면 부처 앞에 엎드렸을 것이라는 가정이 머리를 안 스친 건 아니다.

찾은 횟수를 비교하여 논하자면 나는 벌써 머리 깔끔히 밀고 여승이 되어도 진작 되었어야 한다.

더구나  내 개인적 취향을 보면 절을 좋아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세 번 찾아가 멍하니 보고 온 성모에게 빚이 있다고 느낀 이유는 무언가.

 

의도의 있고 없음이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러 가야겠다는 자발적 발심이 그 이유이다.

절에 구경가서 마주친 부처가 아니라, 맘 먹고 성모를 찾아간 내 꿍심에 대한 승복이다.

문제는, 화장실 문 여닫으며 마음이 바뀌는 간사한 인간이다 보니 남은 여생을 천주교 신자로 살기 버겁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종교를 가짐에 있어 두려움이 있다.

음주가무를 좋아하고 환락적 여생을 향해 달려갈 자세가 갖추어진 내가 종교를 두려워함은 당연하다.

내 맘대로 살다 죽을거야 라는 최근의 결심을 거두지 않는 한 어찌 신앙이란 세계에 뛰어들 것인가.


최근에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나의 절친한 친구가 우울해 죽겠다는 나를 또 전도대상으로 삼았다.

"니가 내 근처에만 살았으면 꼭 성당에 데리고 가는 건데"

"나는 칭구야, 아직 지을 죄가 마이 남았는데, 죄 더 짓다가 죽기 전에 회개하러 가모 안되겠나?"

"일단 가 봐라, 얼마나 마음이 평온해 지는데. 앞으로 지을 죄라는 기 어데 있노?"

"나는 이혼도 해야 하고 연애도 흐흐, 참, 이혼한 자는 성당에서 오지 말라 하제? "

 

외사촌도 내 친구도 좀 성급했다, 나는 내 마음이 다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자발적 발심이 되기를, 그래서 두려움도 후회도 없이 사랑하는 神, 그의 가슴팍에 깊게 묻히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글쎄, 언제 어느 쪽으로 발심이 될 지는 神만 아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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