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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도 혼자 먹는 술

by 愛야 2005. 12. 4.

어느 도사님께서 혼자 먹는 술을 전염시켰음에 분명하다.

이웃 블로그 곳곳에서 혼자 취하느라고 잔이 넘친다.

오늘은 나도 혼자 먹는 술이다.

서쪽하늘에 어린 소주색깔 酒氣를 마음 고운 나는 외면 못 한다.

 

얼마 전 누군가가 김장김치를 한 통 주었다.

받자마자 간사해진 사람 심리가 먹던 헌 김치를 빨리 처치해 버리고 싶어지는 거다.

나는 아들 녀석이 김치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우연인 척 기억한다.

새콤한 헌 김치 송송 계란도 탁, 영화처럼 깨고 양파 울면서 썰어 넣고, 김치전을 두툼하게 부쳤다.

 

저녁상을 볼려고 밥통을 열었는데  밥이 좀 어중간한 양이다.

아들밥을 일단  수북하게 퍼 버려야지.

둘이 먹기 충분할 수도 있지만 성장기 아들의 밥을 고봉으로 푸니 한 숟갈이 남는다.

아, 어쩔 수 없구나.

이제 밥이 없으니 배고픈 나는 할 수 없이 술이라도 먹어야 한다.

부친 김치전은 안주로 쓸 수밖에 없구나.

냉장고 속의 두부도  따뜻하게 데워서, 상하기 전에 빨리 먹는 게 좋다.

 

상 다 차리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헉 술이 음따.

술 떨어진 줄도 모르다닛, 최근에 얼마나 살림에 신경을 안 썼는지 깊은 반성이 된다.

상도 다 차렸는데 술이 없다니, 짜증이 나서 정말 술을 마시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슈퍼로 가기 위해 장바구니까지 챙겨 들고 밖으로 날아 나온다.

퇴근해서 4층 집으로 올라가면 좀체 지상으로 안 내려오는데 말이다.

 

바라보는 어두운 하늘은 결코 내일 눈을 뿌려줄 기미가 없다.

일기예보에는 전국이 대설주의보 품으로 들어간다는데, 남녘 날씨는 포근하기만 하다.

눈은 무슨 눈, 눈 내리지 않는 남도의 날씨가 분하다.

분할 때 술을 마셔줘야지 아니면 억울한 마음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드디어 술을 한 잔 마신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혼자서.

으... 진저리 치며 좋다.

이 싸늘한 술 한 잔이 뭐 이리 힘들었는지.

김치전과 모자란 밥과 내리지 않는 눈이 아니라 금요일 밤이라는 사실로도 어찌 잔을 들지 않으리.

내일 아침엔 알람으로부터 자유롭고, 눈 대신 차락차락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도 좋은걸.

그래서 다시 한 잔.

혼자 먹는 술은 순식간에 우울을 피돌기 시키고, 잊었던 슬픔을 코 앞으로 데려온다. 

나의 목고개가 툭 떨어진다.

그래서 또 한 잔.

 

혼자 먹는 술은 석 잔이면 그만인 것을, 꼬꾸라져 잠들지 못할 슬픈 육신, 거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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