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굿모닝 비뇨기과>라는 병원의 이름을 보며 허허 참 잘 지은 이름이로고 했었던 적이 있다.
남성 전문 클리닉이기에 더더욱 감탄하였다.
무릇 인간에게 굿모닝이란 또 하루밤을 무사히 넘기고, 새로 얻은 하루를 죽기 살기로 버티어 보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특히 남성의 굿모닝한 신체적 증거를 암시하는 저 병원의 이름이야말로 평범한 단어 속에서 찾아낸 기발함이다.
눈만 뜨면 우리가 만나는 수 많은 것들 중 최고는 단연코 '이름'일 것이다.
상호, 상품명, 프로그램 이름, 블로그명, 심지어 여보 당신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에라도 '이름'이 붙여져 본질을 나타내 준다.
나는 '말'(언어)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우리는 노벨문학상에 목매달지 말아야 한다는 이상한 한글 사랑을 나는 가지고 있다.
까짓 노벨 문학상이 뭐라고 우리 언어를 억지스런 번역체로 바꾼단 말인가.
우리말의 그 섬세한 표현을 세계공통어라는 두꺼운 리트머스 용지로는 죽었다 깨도 간파하지 못한다.
'노랗다'와 '노오랗다'의 차이, 어! 시원하다와 어! 뜨끈하다의 동의를 저들은 알 도리가 없다.
글로벌 시대에 발 맞출 일인지 아닌 일인지도 변별하지 못해 우리 문학의 외국화를 무조건 서두르다니, 심히 짜증나는 바이다.
<토지>의 월선과 용이아재의 사랑이 경상도 방언이 아니었다면 그처럼 애틋했겠는가.
그들의 애닯은 경상도 버전 밀어를 영어로 뭐라고 지껄일 것인가.
우리 문학의 영어번역이란 솜바지 위로 가려운 곳 긁는 일이다.
갑자기 국어사랑에 이야기가 좀 옆길로 갔다.
말에 관심 많은 나는 그래서 간판도 알뜰히 살핀다.
다들 아시겠지만 업종에 따라 어떤 공통점들이 있었다.
인상 깊은 몇 가지를 구경해 본다.
1.먹는 집
주 메뉴에 따라 분위기 판이하다.
삼겹살집이나 감자탕집은 일단 걸판지고 코믹하지만, 요즘은 꽤나 세련되고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소 판 돈><빨간 삼겹><낙동강 오리알>,<골통><통뼈><뼈대있는 집><밥 & 술> 등은 대단히 직설적이고 직관적이다.
<돈 돈>은 어찌 해석할까, 미친 돈인지, 돌고 돌아 온 豚인지, 錢이란 건지 동음이어를 이용한 상상력 테스트다.
어떤 감자탕집 간판엔 맨질한 사람 골통머리 그림이 있어 무시무시하기도 하다.
설마 재료를 그림으로 표현한 건 아닐 거라고 믿어야 한다.
섹시한 고깃집 <肉감>도 있다.
명품을 패러디한 <닭스>나, <후다닭><나르는 닭><오 마이 닭!><파닥 파닭>도 재미지다.
한식당은 질박하거나 아니면 고급스러운 이름이다.
<텃골><할매 아구찜>이 있는 반면 <다래><우연>처럼 요정풍의 이름도 있다.
칼과 창이란 무기를 쥐고 음식과 싸워야 하는 서양요리 식당들은 세계 언어의 전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덜 평범하고, 폼나고, 있어 보이고자 외국어 사전 깨나 뒤졌을 것이다.
다들 너무 세련되고 우아해서 오히려 나의 시선을 끄는 이름은 별로 없다.
2. 커피집
커피숍들의 이름은 조금 사색적인 구석이 있다.
1차적인 번역에 의미를 두자면 커피숍은 곧 다방과 다름없건만, 현실적인 둘의 엄격한 차이는 오죽 아실까 해서 각설한다.
낯선 곳에서 커피집을 찾을 때 대부분 그 이름을 보고 분위기를 짐작하여 선택하지 않나 싶다.
요즘은 프랜차이즈 커피숍들이 대부분이라 전국 어디를 가나 익숙한 간판과 이름이 수두룩하다.
쥔장의 안목이 엿보이는 이름과 인테리어를 보기 어려워졌다.
뜻도 모를 외국스런 이름보다는 느낌 있는 소박한 이름이 좋다.
<포도나무><다사랑><마주한 꿈><크레용>...음, 생각이 많이 안 난다.
멋진 이름을 아시면 알려 주시라.
3. 병원
개인의 이름을 간판으로 거는 대표업종이다.
자기 이름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뜻이 있겠지만 재미없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은 망하는 병원도 숱한 시절이니 적극적 마케팅 전략을 펼쳐야 할 것이다.
최근 병원 이름은 <바른눈 안과> <편안한 내과>처럼 서술적이거나 친근한 것들이 많아졌다.
<학문 외과>는 學文과는 아무 연관이 없고 단지 자음접변되는 발음을 빌어왔을 뿐이다.
<항운 외과>, <향문 외과> <상쾌한 외과>등은 다 같은 신체의 한 부분을 겨냥한 전문 병원이다.
한의원은 고풍적인 한자나 진료에 관한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일침 한의원>은 보기만 해도 아프다며, 우리 아들은 절대로 안 가고 싶어진다고 웃었다.
<소생 한의원 ><회생 한의원>등 주로 반 죽다 살아나는 이름이니 죽을 지경이 아니면 안 가고 싶다.
4. 학원
예능학원을 제외하고는 딱딱하기가 천편일률적이다.
<한국 무도학원>은 제법 주의 깊게 봐야 한다.
'무도'의 글자 하나만 바꾸어 '무용'이라고 했다면 한국 고전무용을 가리키는 학원이 되니까. 쩝.
<정예학원> <成文 학원> <大成 학원> <수석학원> <엘리트 학원>등 부담감을 팍팍 안겨주는 이름들이다.
이러니 아이들이 학원 안 갈려고 하나 싶다.
<스타크래프트 학원> <힙합 학원> <햄버거 학원>으로 이름 바꾸면 빛의 속도로 달려갈 것이다.
말랑말랑한 이름의 학원을 본 기억이 없다.
5. 미용실
주인이름 내거는 업종 중 둘째 가라면 서럽다.
옛날 동네 미장원은 <스완 미용실> <퀸 미장원>등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전문성을 확보하고 <박@※ 헤어샵>, 이래야 세련된 것 같다.
하지만 주인장 이름을 건 것처럼 재미없는 간판이 또 있을까.
그중 노력한 멋진 이름들도 보인다.
<깍새> <빠마>는 거두절미한 압축의 미까지 있다.
악! 눈이 확 벌어지는 저 이름!
남성 미용실 <늑대>, 모름지기 이름은 이렇게 지어야 한다.
6. 그 외 여러.
울주군 특산물 <氣찬 배>, 옷가게<옷찾사>, 살 빼기 교실 선전카피 <보이는 것이 다다>, 당구장 <도다리>, 떡볶이집 <빨간 어묵>, 선술집 <술집>(그 이상도 이하도 필요치 않은) 등도 성공작들이다.
요즘 한국 영화에서 자주 써먹는 동음이어 이용하기, 패러디하기 등 기법도 다양하게 발전하는 것이 바로 이름 짓기가 아닐까.
다만 지나친 언어의 변형과 신조어 남발은 한글의 앞날을 고려해 진지하게 반성해 볼 일이다.
돈 있는 사람은 작명가를 찾아가고, 서민들은 가족공모를 한다.
하지만 광고시대에 이르러서는 "네이밍"이 엄연한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고 창의와 기발함을 인정받게 되었다.
뛰어난 이름을 보면 저걸 지은 사람은 분명 머리 두 개 달린 천재일 거라고 생각한다.
남이 지어놓은 것은 쉬운데 내가 짓자면 어찌 그리 두뇌는 작동을 멈추든지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고백하자면 내가 카페주인이었던 적이 있었다.
세가 안 나가서 직접 개업을 해 보았는데, 멋부린답시고 <디아망>이라 지었다.(다이아몬드의 불어식 발음)
망이란 어감 탓인지 몇 달 만에 망했다.
이렇게 간판 구경하면서 길을 다니다 얼마 전 화단 모서리에 걸려 앞으로 꼬꾸라지며 넘어졌다.
왼쪽 무릎을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아직까지 시퍼렇다 못해 꺼멓다.
정신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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