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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인상파 거장전

by 愛야 2006. 9. 24.

 

 

언제나 하고 싶었던 것은 글보다 그림이었다.

학창시절엔, 그림공부를 하지 않은 셈치고 제법 잘 그린다는 착각을 했다.

단지 소질을 발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자위하였다.

그 후로 그림에 대해  부단한 노력이나 애정을 기울였다는 말은 아니다.

언젠가는 꼭 해 볼 거야 하며 벼르기만 하였으니, 이불 밑에서 만세 부르나 마나 아닌가.

 

꼭 한 번, 결혼 직후 집 앞 화실에 등록을 한 적이 있었다.

대문에서 딱 한 번 엎어지면 화실 문이었기에 가까운 맛에 등록하였다.

아시다시피 처음은 내내 선을 그었다.

그 다음 델몬트 오렌지쥬스 박스를 데생하였다.

남자 선생이 어디서 좀 배운 적이 있냐고 접대 차원으로 물었다.

아줌마들 취미로 그 정도라도 하는 게 대견한가 모를 일이지만 우와, 고마 하산하시지요 하며 웃기기도 했다.

그 말처럼 두 달만에 하산하였던 이유는 그러나 잘 해서가 아니라 허리가 다시 아파서였다.

이젤 앞에 몇 시간을 버티고 앉아 있는 일이 힘든 노동이라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복병이었다.

돌아오면 복대를 감고 딱딱한 방바닥에 허리를 대고 누워야 했는데, 이러다가 겨우 나은 허리 병이 다시 도지는 건 아닌가 염려되었다.

그렇게 배움은 종을 쳤다.

아니다, 18년째 휴학 중이다.

 

 

 

 

 

집 근처 시립박물관에서 9월 9일부터 12월 10일까지 <인상파 거장전>을 하고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와 그림들은 워낙 널리 알려져 있어 대중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성이 예술의 큰 덕목이어야 하지만 그만큼 보고 싶은 욕구가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 미국 인상파 원화 87점을 가져다 놓았다고 하였다.

원화라는 말에 원화 같은 복제품은 아닐까 싶었지만, 가을 하늘도 공활하니 가 보기로 하였다.


중간고사 기간 중인 아들은 더 이상 휴일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햅쌀밥에 고등어 구워 아침 먹여 학원으로 보내고 나는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럴 때 다른 블로거들은 서로 어울려 가기도 하더만 그럴 사교성도 없는 나는 혼자 간다.

나는 혼자라야 잘 논다.


 

 

 


관람 티켓은 어른이 만원이고 아이들은 7천 원이었다.

휴일,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세 명 데리고 놀러 나온 한 애국자 부부는 그냥 발길을 돌린다.

당연하다.

그 돈을 점심값으로 쓴다면 온 가족이 행복할 것이다.


나는 내가 강렬하고 미학적인 모티브가 드러나는 그림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이를테면 샤갈이나 달리, 마티스 같은 풍,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고흐의 후기 그림 등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본 유럽 인상주의 그림은 평화와 이미지를 내가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그건 전통적인 기법에 반기를 드는 그들의 색채 기법이 덜 혁신적이거나, 보편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림 앞에 섰을 때 밀려오는 마음의 앉을 자리라고 할까.

창작과 감상의 과정이 예술의 필수라고 본다면 감상이야말로 창작의 마지막 귀착점이며 관람자의 권한이 아닐까 한다.

나는 분석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오로지 나에게 와 부딪히는 느낌에만 의존하는 편이다.

그런 점에선 저들이 중시하는 인상주의(Impressism)에 딱 맞아떨어지는 관람객이 되는 셈이다.

 

 

 

 

<국회의사당, 햇빛의 효과>


클로드 모네의 <국회의사당, 햇빛의 효과>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화가와 건물 사이에는 물이 존재하였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햇빛이 물결마다 황금빛으로 있었다.

더 극명하게 빛이 드러난 것은 <베니스의 팔라조 두칼레>였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에 매일 곤돌라를 물 위에 띄우고 그렸다는 건물이 환하게 햇빛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흐리고 몽환적인 늦은 오후의 연푸른 <국회의사당>이 좋았다.

물결은 노랑, 분홍, 보라색이었다.

"빛은 곧 색채이다"고 한 모네의 주장이 더 할 나위 없이 잘 이해되는 작품이었다.

다만 인상주의라는 이름의 단초가 되었던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베니스의 팔라스 두칼레>


 

사실적이기만 한 그림에는 별 끌림이 없다.

꼭 사실적이어야 한다면 반드시 사실을 넘어서는 감성이 보태져야 한다.

감성은 당연히 내 입맞에 맞는 것이라야 울림이 온다.

그런 의미에서 르느와르나 드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드가의 시선 처리나 인물 배치 기법 등이 높은 가치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 부분은 내 마음을 두드리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트렉 <세탁부>

 

 

 

 

차라리 로트렉의 저 유명한 <물렝루즈>나 <카페의 무희> 등에서 하체 마비된 작가의 인생이 보여진다. 로트렉은 인상파라기보다 인상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후기 화가의 하나라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의 포스터 그림이나 판화 등을 보면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圖解와 구도가 많이 차지하여 어쩌면 진부한 익숙함을 줄 수도 있지만 단지 사실적이라 해 버리기엔 인물은 온몸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고 그것은 분명 애수나 슬픔 같아 보였다.

 

미국 인상주의는 훨씬 모던하긴 하지만 썩 와 닿지 않았다.

프랑스 인상주의가 추진력을 잃어갈 때 미국에 소개된 인상주의는 미국적 풍경과, 거실 침실 같은 여성적이고 극히 개인적 공간이 많다. 감동 없는 산과 호수, 들길과 집은 실용적이고 절제된 감성의 미국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다행히 테어도어 로빈슨의 파스텔화 <절벽에서>와 <물뿌리개>는 소품이지만 따뜻하였고 풍부해 보였다.

 

 

 

           

 

케사트의 판화 <램프>                                       <바느질하는 엄마>

 

 

미국 인상주의에서 메리 캐사트가 돋보였다.

프랑스 인상주의와 교류하여 미국에 소개한 여류 화가이다.

눈여겨 볼 만하였다.

때론 드가나 르느와르의 전형적인 인상파 화풍이, 그녀가 즐겨 그린 어린 아이나 엄마의 모습에 엿보였다.

하지만 사교적이고 부유한 독신 여성화가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다고 할까.

더 이상은 없어 보였다.

또 일본 판화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하여 흡사 일본화를 보는 듯했다면 내 시야가 너무 편협한 것일까.

 

한 바퀴 돌고 나니 1시간여가 지나 있었다.

다시 모네의 앞으로 되돌아갔다.

가까이서도 보고 댓 발자국 떨어져서도 보았다.

여전히 황금빛 물비늘이 반짝였고, 해는 뉘엇뉘엇 넘어가고, 혹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역시 모네였다.

 

 

 

 

 

 

아는 것이 없으므로 인상주의 그림을 정말 "인상" 그대로 감상할 수밖에 없는 나같은 사람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관객이 아닐까.

박물관 뜰엔 배롱나무가 낮은 모습으로 꽃 피우고 꽃 지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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