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30분.
커피는 한 시간 전에 마셨다.
오늘 아침 일과를 끝으로 주말 모드로 들어간다.
주말 계획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내 주말은 무조건 쉬는 시간이다.
바닥에 닿는 몸의 면적이 커질수록 행복했다.
T.V.에서 아침마당을 한다.
내노라 하는 남녀 똑똑이들이 남북회담 스타일로 마주 앉아 마구 떠든다.
재치있는 입심에 병풍처럼 빙 둘러앉은 방청객들이 순발력 좋게 웃어준다.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내 얼굴은 심드렁하기만 하다.
잠이 올려는 찰라다.
요즘은 몸이 땅 속으로 곧잘 들어간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에잇, 버얼떡 몸을 일으킨다.
아침에 끓여놓은 오뚜기 크림스프를 데워 한 그릇 먹으려다 그만 둔다.
청바지 후닥닥 입고 나오려니 수북한 빨랫감과 어질러진 온 집안이 날 쳐다본다.
흥!이다.
뜻한 바 있다.
독립운동은 아니다.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지 말자.
내 맘대로 노는 데 하루를 쓰자.
생각만 하고 실천이 미흡했지만 오늘은 꼭 그래 버리자.
그리하여 나는 9시 55분에 <라디오 스타>를 보러 집을 떠났다.
첫 상영은 11시였다.
5000원, 부지런한 관객을 위해 할인이 되었나 보다.
객석 7줄의 작은 상영관에 두 줄을 점령한 군인들의 단체관람이 있었다.
맨 뒷줄엔 아줌마들이 나란히 앉았다.
아줌마들도 단체관람처럼 보이지만 모르는 세 팀이 한 줄에 모여 앉은 것이다.
그 한복판이 3.8선같은 내 좌석이었다.
좌,우 여자들이 각각 수다에 열심이다.
영화 속에는 과거와 현재가 마주보고 있었다.
감독은 그것을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풀고 싶었나 보다.
'왕년'과 디제이가 과거의 장치라면, 촌빨 날리는 영월 유일한 롹그룹 이스트 리버와 인터넷은 현재의 흐름이였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떠도는 가장이 과거의 전형이라면, 지하도에서 아내와 같이 김밥을 파는 모습은 현실의 변화다.
비록 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20년을 헌신한 인간적 매니저가 과거라면, 기업화된 매니저먼트 사업은 현재의 단면이다.
강원도 영월과 서울도 그러한 배경이다.
실패와 성공의 설정이다.
이런 모든 대립적 구도에서 감동은 언제나 과거의 편에 서 있다.
과연 현실에서도 '따뜻함'의 가치가 속물성을 넘어설까, 그럴까.... 그러기를 바란다.
구식 라디오 음악프로는 인터넷을 타고 전국에 퍼지며 신식과 부드럽게 악수를 한다.
더 이상 홀대받는 구닥다리가 아니라 향수와 추억을 담보로 차별화되는 나름의 색깔이 되었다.
대체 성공의 기준이 뭐란 말인가.
찬스는 참으로 우연히 눈물겹게 오는 것인가.
잘 짜여진 T.V. 단막극의 익숙한 주제와 설정을 보는 듯했다.
영화적인 스토리 텔링으론 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예측을 불허할 사건이 없으니 결말은 누구나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대신 간결한 페이소스와 잔잔한 동화(同化)의 과정에 만족하여야 했다.
감탄이 있었다면 두 배우의 연기를 향한 것이다.
자칫 지루할 위기를 그들의 찡한 몸짓이 덮어주었다.
그들의 원숙함은 절정처럼 보였다.
안성기의 떠남과 박중훈의 눈물에 내 옆좌석 여인들은 우동 먹는 소리를 훌쩍훌쩍 내기 시작한다.
나도 조금 슬프려고 했다.
무표정히 김밥을 꾸역꾸역 먹는 안성기에게,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던 가난한 아내 때문에 왈칵 말이다.
이 남자, 안성기.
젊은이였을 때도 그의 눈가는 주름으로 아름다웠다.
극중 박중훈 뿐 아니라 관객까지 구슬리고 다독이고 얼러 결코 그들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그의 힘....
영화관을 나왔다.
한낮이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바닷가로 나간다.
자판기 커피 기계 앞에 서자, 바로 뒤에서 커피 사세요하는 말이 들린다.
뒤돌아보니 커피 파는 아줌마다.
누군가가 커피 뽑을려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자신의 커피를 사 먹으라고 외치는 것이다.
자판기 곁이 그녀의 자리다.
500원, 틈새 공략 상술이다.
자판기의 위생상태를 떠올려 보며 나는 흔쾌히 그녀의 커피를 택했다.
그리고 주문한다.
많이 주세요.
서서히 해가 기울 준비를 하는 바다는 점잖다.
부산하지 않고 강렬하지 않다.
더 이상 눈부시지 않고 침묵하게 한다.
자전거가 달릴 수 있는 공간을 인파로부터 돌려 받는다.
수용하는 그 무엇. 늙어가는 배우의 자연스레 구겨진 뒷모습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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