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CGV가 오픈된 지 벌써 몇 달째이건만 그 쇼핑몰 건물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영화는 남포동 나가야 되는 줄 아니 구세대임은 부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영화가 고팠던 금요일, 오후가 훌쩍 넘어선 시간이라 남포동을 포기하고 동네 영화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새 CGV 쇼핑센터는 곧 망하지 않을까 내가 다 걱정이 되었다.
금요일 늦은 오후이면 북적대야 할 시간인데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아직 입점되지 않은 가게들이 군데군데 비어있어 더욱 그랬다.
건물사장의 사돈의 팔촌도 아닌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집근처 영화관이 편리했으면 했지 불편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오래 유지되기를 바랬다.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조명등, 전기세나 나오겠나....
니콜 키드만과 잭 휴먼의 <오스트레일리아>를 보았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명성과 어마어마한 제작비, 3년에 걸친 완성기간, 셋트장 설치와 의상의 변천 등 도움말은 검색하면 다 나온다.
웅대한 대서사시니 스펙타클이니 예고는 요란했지만 그럼 뭐하나, 시작 직전에 약간의 관객이 들어왔을 뿐이었다.
우리 동네 수준이 낮아 그렇겠지?
스토리에 대한 긴장감이나 기대감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이 다 보이는 "따뜻한 휴머니즘의 가족영화"였으니까.
더구나 악인의 설정과 그 응보, 주인공들의 기적적 회생, 나레이션 등 따분할 전형적인 요소는 다 갖추고 있었다.
호평과 혹평이 공존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는 빠르고 담백한 전개와 유머, 정신을 깨우는 효과음 덕분이었다.
나는 배우들과 볼거리에 집중했다.
너무나 부러운 광활한 땅덩어리와 원시성, 거침없이 말을 타고 달리는 호방한 여인이라든지.
니콜 키드먼은 연기력 부재의 미인여배우라는 오명을 벗은 지 꽤 되었다.
그녀는 영화의 거친 흐름에 온몸을 내맡기는 것 같았다.
귀여운 똥배를 가진 빼어난 패셔니스터였다.
앞으로 좋아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잭 휴먼처럼 눈으로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는 남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눈웃음 혹은 강렬하려고 애쓰는 눈빛 말이다.
그는 젊은 크린트 이스트우드 같았다.
눈 아래 주름마저도 닮아있다.
쳇, 나는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지나치게 우수어린 인상이 부담스러웠는데.
그런 꽈보다 차라리 잭 니콜슨이 더 좋다.
잭 휴먼은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몸은 소몰이꾼 역할에 맞게 탄탄하고 멋졌다.
우리나라 꽃미남들도 이상하게 몸을 더 근육스럽게 다듬으려 하는데 이런 정신세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똑같은 증세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원주민 혼혈소년 '눌라'.
호주 원주민들의 짓밟힌 삶을 대변하는 그의 존재가 없다면 이 영화는 아무 의미가 없으리라.
어린 소년의 꿰뚫는 듯한 검은 눈이 시종 관객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 느껴졌다.
영화 밖 역사 속에서도 그들을 껴안은 문명인들이 많았더라면 백인의 호주 상륙기는 훨씬 덜 잔인했을 것이다.
‘파어웨이 다운즈’ 농장 새 마스터 니콜 키드먼과 소몰이꾼 잭 휴먼의 사랑은 소년 '눌라'가 맺어준다.
그 셋은 피 한 점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그러나 셋은 서로를 향해 피 흘리며 다가간다.
폭격의 연기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들의 처절한 모습에 나는 잠시 소름이 돋았다.
눈물도 찔끔 나왔다.
배경으로 흘러나온 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 주제곡 <Over The Rainbow> 탓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때문이었다.
언젠가는 퇴색되고야 말 사랑.
사랑이 있다는 말은 소문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여전히 사랑이 절대적 가치다.
그 환상에 정성을 다하는 어리석음이라니.
사랑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상처로 돌아오는 부메랑임을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럼 너는 알았느냐고?
몰랐다.
깨닫고 나니 인생이 거의 끝나려 하는 중이다.
1500마리 소떼가 지축을 흔드는 굉음으로 귀가 얼얼하였다.
얼얼하다 못해 영화를 다 보고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니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했다.
몸살 때 이 영화보면 시원하겠다.
저무는 2008년 영화관 로비엔 여전히 달콤한 팝콘 버터 냄새가 떠다니고 사람들은 영화를 고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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