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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몇 편

by 愛야 2012. 3. 7.

 

새해 들어 두 달 동안 본 영화들.

 

자전거를 탄 소년... 지난 번 언급.

내가 사는 피부.

파(Paa)

범죄와의 전쟁

하울링

움(womb)

부러진 화살.

 

<내가 사는 피부>는 그 중 최악이었다.

주인공 안토니오 반델라스.

기존의 연기 패턴에서 벗어난 캐릭터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토니오 반델라스였다.

그 크고 느끼한 남미적 눈은 한 단계 높은 연기의 방해요소일 뿐이다.

도무지 황당무계한 스토리야 영화적 환상이라고 치더라도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으니 내가 수준 낮은 관객인가 싶다.

 

                       

 

 

가볍지 않은 주제를 경쾌한 터치로 이어가는 인도 영화 <Paa>.

12살이지만 조로증으로 65세의 신체적 나이를 사는 주인공 '어로'ㅡ 유머스럽고 엉뚱하며 장난꾸러기다.

급속도로 노화되어 가는 삶의 막바지에서도 부모를 이어주는 기특한 늙은이다.

영화를 전개하는 방법은 담백하고 경쾌하지만 연기는 우리나라 옛 영화와 닮아 있었다.

문희나 윤정희가 느닷없는 소나기 속에서 흐느끼는 그런.....

어쩐지 여성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아 물론 공짜 관람의 힘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구별되는 아이들을 보는 시선은 인도라고 다를 바 없었다.

지나가던 한 여자가 '어로'의 엄마에게 호기심스런 표정으로 "아이가 어디 아픈가요?" 물었다.

의사인 "어로"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사무적인 어조로 빠르게 말을 했다.

"저 아이는 내 아들인데 조로증이에요. 우리 몸엔 00개의 DNA가 있는데 00개의 염기배열이 필요해요. 그 중 몇 번째 염기배열이 @#$% 되어서 $%#@*& 하면 저런 아이가 생기지요. 50만 명 중 한 명이지요." 그리고 쐐기 박듯 말을 맺는다.

"Lucky boy, 음?"

구경거리 보듯 물었던 여자는 질려 자리를 떠났다.

흐흐, 이런 대사가 눈물로 감동을 쥐어짜는 우리 영화와 좀 달랐다.

 

<Paa>를 보던 내내, 옆 좌석의 중년 여인이 너무나 영화에 몰입되어 리액션이 과했다.

흐흥, 어~~, 어흐흣, 저런, 단 한 장면 거르지 않고 추임새를 하였다.

나는 너무나 거슬려서 몇 번이나 흘깃 눈총을 주었으나 그녀는 스크린에 빵구 낼 작정으로 레이저만 발사하고 있었다.

물론 쥐죽은 듯이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나도 우스운 장면에선 씨익 정도 웃을 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와 혼연일체가 되어 호응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것까지야.

그 아줌마는 주인공이 죽는 장면에선 결국 우동까지 들이키며 손으로 연신 눈을 훔친다.

참 고운 마음의 아줌니다, 어흑.

대단히 좋은 영화였음에도 영화 밖의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 엄청시리 받았다.

 

 

80년대 건달들의 패션이 더 재미있었던 <범죄와의 전쟁>.

올백, 혹은 2:8 가르마, 묵직한 체인 금목걸이(아, 향수스러워라), 더블 정장, 호텔 커피샵에서 진 치는 스타일.

깡패들의 이야기는 왜 대체로 부산 부두세관이나 남포동이 주 무대일까.

<친구>도 그렇더니, 경상도 사투리의 무지막지함이 유머도 주고 잔혹함도 준다.

하정우의 억누른 톤의 경상도 사투리는 최민식보다 자연스러웠다.

아, 최민식의 개기름, 모공 한 땀 한 땀 닦아주고 싶었다.

 

 

<하울링>은 <내가 사는 피부> 비슷한 수준으로 황당하였다.

애초에 늑대개를 이용한 살인 어쩌고 할 때부터 아니다 싶었는데 관객이 많다니까 설마 그만한 값은 하겠지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나영 구경은 잘했다만, 돈이 아까워서 보자고 우겼던 친구에게 눈을 째렸다.

 

 

                                                                                                                     ㅡ  열 명 정도 앉은 텅텅 빈 객석. 스크린을 직접 찍었더니 화질이 거칠다.

 

 

그리고 <움(womb)>.

스토리를 놓고 본다면 미래적 이야긴데 도리어 영상들은 과거로 돌아간 듯 고풍스럽다.

그것이 경박함을 걸러내고 진지함을 주었다.

유럽 영화 특유의 무겁고 깊은 음울함을 즐기고 싶으면, 짧고 절제된 대사가 주는 침묵이 불편하지 않다면 봐도 좋다.

 

사랑이 식기도 전에 사고로 끝난 사랑은 급기야 유전자 복제라는 병적 집착을 초래하였다.

이미 사망한 남자의 유전자 복제, 만화도 아닌데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나 모든 과학적 수긍에 따른 절차는 진 빼지 않고 간단히 건너뛴다. (그것이 포인트는 아니니까) 

홀로 남은 여자가 열 달 후 낳은 유전자 복제 아기는 그럼 자식인가 연인인가.

복제 유전자가 착상되어 한 인간으로 완성되기까지 자궁에겐 <품는> 역할 외 영향력이 없단 말인가.

태어난 존재는 오롯이 유전자 주인의 복제품이기만 한 걸까.

여자는 엄연히 엄마일까, 아닐까.

나는 그냥 머리가 복잡하였다.

다만,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조작하여 만들 순 없다는 것, 그럴 권리가 어디 있냐는 것, 그 정도에서 생각을 딱 멈추기로 했다.

딸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보고, 아들에게서 남편의 젊은 모습을 보는 것도 일종의 유전자 복제이지 않은가.

 

 

 

 

에바 그린의 어두운 눈은 불행한 여인과 너무나 어울렸다. 

긍정적인 삶은 결코 그녀 몫이 아니어야 할 것 같은 여배우.

불행해 보이는 아름다움에는 퇴폐의 향이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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