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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그다드 카페로 가는 길

by 愛야 2011. 12. 24.

 #1.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겨울을 낭만적으로 견딜 수 있는 도시다. 하지만 그날은 바람이 심했다. 강변을 달리는 차들은 바람에 떠밀려 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막 시작되려는 어둠이 강변을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5시가 넘어가는 강변은 가로등이 켜지고 아름다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는 강물이 바다의 몸속으로 합쳐 드는 지점이다. 수면을 스치고 올라온 겨울바람은 나무 사이를 지나온 바람보다 더 냉혹하였다. 뜨거운 사막의 한 카페를 확인하러 가는 날씨로는 어쩌면 적합하였다. 

 

나는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국제영화제에 맞춰 개관한 <영화의 전당>에서 개관기념 이벤트로 영화 백 편을 상영하는 중이었다. 퇴근길 저녁도 거른 채 곧장 향하는 나는 마치 매니아 같았다. 상영시간까지 무려 3시간이나 남았지만, 집에 들렀다가 다시 나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토록 칼날 같은 바람이 불고 추운 날은 말이다. 더구나, 내 기억에 저녁 8시라고 저장하였으나 혹시 18시를 8시로 잘못 기억하는 건 아닐까 의혹이 일기도 했다. 이젠 정말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신호등을 두 개 건넜다. 그래도 저 웅장한 건물은 여전히 저만치였다. 한 뼘 일직선의 거리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추운 탓이다, 추워서 그래, 나는 얼른 건물에 당도하고 싶었다. 따뜻하게 커피를 마시며, 건물 안에서 빈둥빈둥 남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 살벌한 추위 속으로 다시 나오지는 않을 테다. 신세계 센텀과 롯데백화점이 영화의 전당 바로 곁에서 찬란히 유혹할지라도.

걸어가는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물 앞 광장과 창에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로와 바로 연결된 에스컬레이터가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들여다보이는 로비에는 흔한 경비 아저씨나 방문객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휑하였다. 사람은 오로지 시퍼렇게 언 나 혼자였다.

 

순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과연 저 안에서 따뜻한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졌다. 나 몰래 상영이 취소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몇 주일 전에 가져온 프로그램 팸플릿에 동그라미를 쳐두었다가 찾아온 것뿐이니까.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디디자 계단이 움직였다. 그 응답이 기뻤다. 첫 번째 에스컬레이터는 3층까지였다. 3층에서 꺾어 두 번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6층까지 올라갔다. 홀로 가는 긴 에스컬레이터는 참으로 지루하였다. 6층까지 가는 동안 단 한 명의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 노르스름하고 따스한 조명과 나를 실어다 준 기계를 만났을 뿐이었다.

 

6층은 매표 로비였다. 매표 카운터마저 텅 비어 있었다. 불길하였다. 아, 하지만 곧 뒤편 문을 열고 나오는 여직원의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나는 사람을 드디어 발견한 표류인처럼 기쁘게 다가갔다. <바그다드 카페> 한 장 주세요. 네, 뒷좌석으로요. K열 어떠세요? 네, 좋아요, 가장자리로 주세요. 얼마요? 3000원? <바그다드 카페>가 현실이 되어 내 손에 들려졌다. 나는 비로소 안도하였다.

 

8시 상영이었다. 내 기억을 믿었어야 했다. 무려 두시간 반이란 긴 공백은 막막하였다. 말했다시피, 나는 추운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고,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휴게실 컴퓨터를 해도 시간이 그대로였다. 오줌을 아주 천천히 눌 걸, 손도 한 열 번쯤 씻고.... 잠시 후 나는 백화점을 향해 그 춥게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가고 말았다. 연말 백화점은 혼잡했다. 상품들을 일별 하는 것만으로도 두 시간은 쉽게 흘렀다. 시간은 역시 상대성이다. 상영시간에 맞추어 영화관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나타나 웃고 차를 마시거나 서로 껴안고 있었다. 신기루 같았다.

 

#2.

<바그다드 카페>. 전설 같은 영화. 나에게는 몽환적이고 나른하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남았던 영화. 그러나 다시 본 그 영화는 내 기억보다 훨씬 경쾌하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따뜻하고 착해지고 또한 슬퍼졌다. 나이대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는 게 확실해졌다. 내 젊은 기억을 셋팅했던 것은 느릿느릿한 <Calling you>와 사막의 모래바람이었다.

 

#3.

영화가 끝나고 다시 길로 나선 밤 10시, 바늘로 찌르는 듯 차가운 바람에 나는 정화되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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