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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침투기

by 愛야 2015. 6. 17.

 

 

#1

자고 나면 뉴스에서 메르스 관련 숫자를 상향 조정한다.

이제는 질려서 알고 싶지도 않지만, 알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이 도시에 슈퍼전파자 후보가 나왔다는 소식 이후 거리에는 마스크 쓴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어제는 그 귀하다는 N95 마스크를 쓴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지나가는 것도 보았다.

버스를 탔더니 마스크는 물론 흰 장갑까지 장착한 semi-할머니들이 셋이나 있었다.

의료요원 못지않은 비장한 태세였다.

나 역시 손잡이와 누르는 벨이 찜찜했지만 미처 흰 장갑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요즘 白手라, 도둑이 제발 저렸다.

 

대학병원 입구에서 방문자들을 줄 세우고 손 세정제를 꾹 눌러주며 일일이 왜 왔느냐고 묻는다.

진료예약 있어 왔노라 하였다.

정말 오고 싶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를 맡았던 청년이 예의바른 어조로 진료 예약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흐흐흐, 와중에 그 상황이 웃겼다.

이 난리 판국에 진료도 없는데 있다고 거짓말하고 병원에 오는 사람도 있나?

하지만 맘에 들어, 너의 그런 자세.

말만 듣고 넘겨주지 않는, 친절하나 철저한, 그런 엄격함이 많으면 많을수록 둏고 둏아.

 

언제나 사람이 넘쳐났던 대기실은 한산했다.

간호사 데스크에 예약증을 내밀자, 간호사는 잽싸게 내 귀에서 체온을 염탐하더니 문진서를 내민다.

최근 서울.경기지방 다녀온 일 있나, 열 기침 등 있나, ㅇㅇ구 @@구 소재 병원에 다녀온 적 있냐 등이다.

항목에 체크한 후 자필 사인까지 하란다.

시상에나, 그렇게 접수한 지 5분도 안 되어 내 이름이 불리다니!

아무리 예약을 했기로서니 이렇게 광속으로 의사를 만나기는 처음이라, 연거푸 부를 때까지 나인 줄 몰랐다.

의사와 간호사와 환자는 마스크 너머 드러난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소통했다.

시간에 덜 쫓기는 의사와 간호사는 자상하게 몇 마디 더 설명하였다.

나는 그 바쁘던 의사가 귀여운 눈웃음을 짓는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불안한 감염시대에 만나게 되는 이 평화의 모순이여.

 

약이 일주일 정도 여유가 있어 진료를 미룰까 생각했지만, 일주일 후라고 메르스가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가는 대학병원이 아직 무사할 때 후다닥 다녀오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3개월 치 약과 마스크 두 팩, 휴대용 손 세정제를 사고 집 근처까지 와서 마스크를 벗었다.

후유우, 숨이 길다.

적진에 침투해 임무를 성공한 후 무사히 빠져나온 스파이 같았다.

책상머리가 아닌 현장 의료인들의 수고로움에 감사했다.

 

 

#2.




 

 

 

며칠째 날씨가 흐리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안 오는 것도 아니다.

여름 이불로 바꾸고, 덮었던 이불을 빨려고 뭉쳐두었지만 그 자리 그대로다.

 

어제 오후처럼 바다로부터 안개가 밀려오는지 세상이 뿌옇다.

창문을 두어 뼘 연다.

역할을 걸치지 못한 세탁소 옷걸이가 소심하게 바람을 증명한다. 

 

간호사가 염탐한 나의 온도는 35도 8.

체온이 낮은 편이시군요.

네.... 늘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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