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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구경하는 점심

by 愛야 2017. 9. 29.

바람이 선선하지만 한낮의 햇빛은 따갑다.

익고 맛 들어가는 모든 것들을 위한 마무리 햇살이다.

다만, 걷는 자, 특히 더 이상 젊지 않은 여자는 제외하고 말이지.

나는 햇살과 땀을 피해 공원 정자로 올라섰다.

마침 아무도 없어 시원한 마룻바닥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아고고 곡소리가 절로 난다.

 

잠시 후 할머니 두 분이 올라선다.

두 분 다 배낭을 불룩하니 지고 있었는데, 한 분은 퉁퉁하고 한 분은 깡마르셨다.

한쪽 귀퉁이에 앉자마자 배낭을 끌렀다.

점심 도시락이었다.

나에게 예의 삼아 한번 권한 후, 머리를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드시기 시작했다.

 

퉁: 이거 먹어 봐, 된장에 무쳤어.

깡: 응?

퉁: 이거 먹어 보라고, 된장에 무쳤어.

깡: 으응. 맛있네. 집된장이제?

퉁: 파는 된장하고 섞었어. 집된장만 하면 너무 짜.

깡: 응?

퉁: 파는 된장하고 섞었어, 집된장만 하면 너무 짜.

깡: 으응, 그렇지.

퉁: 필요하면 가져다 먹어.

깡: 응?

퉁: 필요하면 가져다 먹어.

깡: 올해 나는 된장 안 담가서 없긴 해.

퉁: 지난번 우리 메누리도 와서 많이 퍼 갔어.

깡: 응?

퉁: 지난번 우리 메누리도 많이 퍼 갔어.

.

.

.

(이하 많은 응?과 반복답변이 있었음)

 

휴우.....

깡마른 할머니는 한 번에 듣질 않고 되묻고, 퉁퉁한 할머니는 자신이 두 번씩 대답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복한다.

깡마른 할머니가 두 번째 대답엔 무리 없이 들으시는 것으로 봐서 청력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습관인 듯했다.

하지만 습관이라며 넘어가기엔 상대를 지치게 한다는 게 문제다.

노인이라는 조건도 봐 드릴 이유가 되진 않는다.

말습관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닐 테니, 평생 죽 그래왔을 확률이 크다.

그런 사람이 꼭 있다.

상대가 말을 할 때 별 의미 없이 응? 하고 되묻는.

그러면 속으로 언짢아도 다시 말해 줄 수밖에 없다. 

맹점은, 본인은 자신의 말버릇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순간 집중을 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습관적으로 그러는지 아닌지는 몇 번 주고받고 말을 해보면 안다.

 

정작 두 할머니는 소풍을 잘만 즐기고 계신데, 이 성질 급한 관객 끙 일어나 나왔다.

시원한 정자를 두고 한낮의 길로.

허허, 굳이 비교하자면 절 떠나는 땡중의 심정이랄까.

말과 글에 예민한 것도 병이여,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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