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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남자의 콩나물

by 愛야 2018. 5. 20.

 

다음 정류소에 대한 안내가 나오자 옆의 아저씨가 부스스 깬다.

그는 발치에 두었던 큼직한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일어난다. 

친절한 내가 다리를 당겨 지나갈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가 내 앞을 빠져나갈 때 검정 비닐봉지에서 비릿한 콩나물 냄새가 났다.

 

수그린 내 시선에 그의 형광 오렌지색 운동화가 들어왔다.

운동화는 새것처럼 보였다.

늙수그레한 아저씨에게는 참으로 결단력이 필요한 색채가 아닌가.
형광오렌지 운동화에서 위로 시선을 올리던 나는 움찔했다.

역시 오렌지와 노랑과 그외 다수의 동일계통 색상으로 얽힌 무려 체크 바지.
운동화보다 연한 오렌지색과 베이지와 연두 등으로 이루어진 역시 체크 재킷.

 

오렌지색을 대단히 좋아하는 모양이다.
상.하의 딱 같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은, 통일감 없는 오렌지 체크 한 벌!
더구나 어깨와 바지통이 넓은, 유행 한참 지난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토록 어지럽게 차려입은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오렌지 체크 양복을 차려입고 콩나물을 사러 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춤을 추러 갔다.

춤이 끝나고 난 뒤 문득 잊지 않고 콩나물을 샀을 뿐이다.

어찌 아느냐고?

그가 B시장 정류소에서 버스에 올랐기 때문이다.

 

#2

오래전부터 B시장 입구 건물에는 약간의 입장료로 춤추는 곳이 있다고 했다.

늦은 오후 시장 거리에는,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차림의 그들이 있었다.

옛날의 나는 너무나 놀라 뒤를 돌아보기까지 하였다.

하얀 가부키 화장으로 골골이 주름이 강조된 얼굴에, 인어치마와 하이힐의 할머니들.

그 옆에는 구닥다리 양복과 남방셔츠, 구두를 신은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노인임을 필사적으로 감추려 하고 있었다.

결코 윤택해 보이지 않은 표정과 낡은 복장들로.

 

댄스 데이트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장을 보며 마무리하는 커플도 많았다.

그 장면은 참으로 생경하고 유머러스했다.

반짝이 입은 할머니와 백구두 할아버지가 같이 팔짱을 끼고 상추나 콩나물을 각각 사서 헤어지는.

나는 의아했다.

왜 굳이 장보기를 하나, 달콤한 무드 뽀사지게 말이야.

차라리 춤이 끝난 몽롱한 지점에서 바로 헤어지라고!

막판에 꼭 군내 나는 현실을 서로 각인시켜야 해?

설마 식구들 속일 핑곗거리로 장을 본 거야?

속고 싶어도 결코 속을 수가 없는 옷차림을 하고서?

 

#3

언제부턴가, 나는 그들이 더이상 놀랍지 않았다.

슬펐다.

두 감정 사이에 수십 년 세월이 있다.

내가 이제 그들의 외로움에 근접하게 된 것일까.

 

요즘엔 그들을 뒤돌아보느라 발걸음 멈추진 않는다.

일별도 없이 하하 무관심하게 가던 길 간다.

난해한 오렌지 체크 양복을 만나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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