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란다의 감자를 처리해야 했다. 이미 시들어 쪼글쪼글한데, 이러다 싹마저 나면 버릴 수밖에 없다. 시든 껍질은 물기를 잃어 칼날을 매끄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뭉텅뭉텅 두껍게 깎인다. 아깝다. 드러나는 속살은 초록색이다. 이를테면 감자의 탈을 쓴 키위. 빛을 많이 쬐면 초록 감자가 된다지만, 내 수준에서 짐작해 보면 그냥 추위에 파르라니 질린 게 아닐까.
뚬벙뚬벙 썰어 냄비에 담고 소금과 그린스위트를 한 스푼씩 넣어 삶는다. 조리의 과정은 그게 다다. 큼직한 반찬용 감자인데, 구입할 때는 감자채 볶음을 염두에 두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유효기간은 한참 지났다. 이제는 감자의 용도가 아니라 나의 용도대로 쓰기로 했다. 반찬용 감자지만 삶아 먹고 싶으니 그리 하는 것이다. 맛있는 냄새가 어느새 퍼진다. 통감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빨리 익는다. 맛있어 보이기 위해 냄비를 흔들지도 않았건만 적당히 포슬거린다. 주먹만 한 반찬 감자는 그렇게 나의 행복한 저녁밥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규격이나 용도, 뭉뚱거려 '형식'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정형이란 모름지기 편견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깨닫고 있다. 예를 들면, 미역국에 소고기 아닌 무우를 넣고 끓였더니 감칠맛 나며 깔끔했다. 얼큰 라면에 양배추를 잔뜩 넣어 건져 먹는 맛도 쏠쏠하다. 글쎄다, 독거노인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의심된다면, 가끔 베란다 구석탱이에 큰 감자를 방치해 볼 일이다.
#2
날씨가 따뜻했는데 다시 며칠간 춥다고 한다. 그저께는 비가 종일 왔고, 어제는 바람이 심해서 창문이 덜컹거렸다. 해마다 이맘때 되풀이되는 날씨다. 그래, 이만하면 봄이다. 거실 창에 바짝 붙여놓은 내 테이블에서 밖을 보니, 멀리 어느 집 옥상의 펄럭이는 빨래조차 봄이다. 공원에는 홍매화가 진작 피었고 다른 꽃들은 시동을 거는 중이다. 올해는 아름다워야 할 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