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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체중계 위에서

by 愛야 2021. 3. 18.

겨울은 탄수화물의 계절이다. 특히 이번 겨울은 더했다. 치과치료를 받느라 부드럽고 편한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니 상온이라도 차가운 과일이나 채소들은 내 치아를 더 힘들게 했다. 그렇다고 치아 시린 것을 피하기 위해 샐러드나 과일을 따끈하게 데워 먹을 순 없었다. 귤도 입에 물고 체온으로 잠시 데운 후 조심조심 씹곤 했다. 반면, 맛있는 탄수화물 폭탄은 겨울과 특히 어울렸다. 떡국, 만둣국, 떡만둣국, 칼국수, 김치국밥, 군고구마, 호박죽, 그리고 라.면.

 

도대체 TV에서는 왜 그토록 라면을 끓여대는지, 라면회사와 모종의 결탁이 있을 거라는 음모설을 조심스레 제기해 본다. 급기야 조인성까지 대게라면을 끓이고, 불행한 연인들도 툭하면 노랑냄비에 라면을 끓이며 불행을 소꿉장난으로 승화시켰다. 화면으로 보는 라면은 더 먹음직스럽다는 게 늘 의아했다.

 

그나마 스스로 기특한 것은, 한밤중에 라면이나 먹방을 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더 이상 식욕이 없어서, 야식 먹는 불상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이런 결심을 할 뿐이다. 내일 일어나면 첫 끼니를 라면으로 먹고야 말겠으, 얼큰하게, 만두도 몇 알 넣어야지. 청사진을 그리며 잠이 들지만 정작 아침이 되면 포부는 퇴색되어 커피와 빵 하나만으로 만족하였다.

 

이것이 문제였다. 라면은 두뇌회로 속에 매복해 있다가 끝내 저녁식사로 실현된다는 것. 질긴 놈. 추운 겨울날 저녁뉴스를 보며 먹는 라면은 종종 나의 밤산책을 포기시키거나 소주 몇 잔을 불러들이곤 했다. 기어코 먹고 말 거라면 차라리 아침에 먹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식욕은 왜 오후에 폭발하는 거람.

 

이느무 탄수화물을 줄여야 혀, 요즘 아침 공복혈당이 높어, 중얼거리며 상추를 산다. 오랜만에 미어지게 상추쌈을 먹어도 한기가 들지 않을 만큼 봄이 되었으니까. 겨울 동안 몸무게의 앞자리가 바뀌었지만 곧 되돌아 갈 것을 믿는 이 자만심은 무엇? 싱크대 선반에 쟁여진 라면 두 팩은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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