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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늘어가는 것

by 愛야 2006. 10. 20.

 
1. 김밥 완전 정복 

오늘은 아들 소풍날이다. 중학교 마지막 소풍인 셈이다. 소풍에 들뜰 학년은 아니지만 책걸상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아시아 정상들이 폭죽 구경했던 동백섬 누리마루로 간단다. 날씨는 좋다.

 

김밥을 싸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24시 김밥집에서 두어 줄 사는 게 시간으로나 돈으로나 훨씬 경제적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김밥 마는 솜씨가 볼품 없어 그렇다. 하지만 이번은 중학교 마지막 소풍인데 사서 보내기엔 양심이 있었다. 아들에게 물었다. 사 갈래? 아님 엄마가 싸 줄까? 내심, 엄마 김밥은 맛 없어, 해 주기를 바랬다. 아들은 아직 효도가 뭔지 모른다. 엄마가 싸 줘 했다. 눈치 없는 넘.

 

내가 만 김밥은 나 닮아 그런지 힘이 없다. 속이 단단하지 않고 느슨하다. 내 딴엔 손아귀 힘을 꽉꽉 줘서 김밥을 마는데 썰어 보면 헤벌레하다. 김밥 속이 한 군데로 모여 있기도 하다. 이 나이 엄마 치고 김밥 쯤은 도사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비난하지 마시라. 솜씨가 따라주지 않을 뿐, 이론은 빠삭하다.

 

드디어 오늘 아침, 만반의 재료를 앞에 놓고 김밥말기를 시작한다. 김발을 펴고 김, 밥, 속재료를 가지런히 놓았다. 재료를 나란히 늘어놓는 거야 쉽다. 이제 말 차례다. 흐읍...이 부분이 두렵다.

 

말았다! 단번에 휙 접은 후 손아귀 힘을 주어 마저 만다. 만져보니 저번보다는 내공이 세어졌는지 단단하다. 불안해서 일단 먼저 한 귀퉁이를 썰어 확인한다. 자신감을 얻어 계속 만다. 오이 넣고 말고 시금치 넣고도 만다. 여전히 재료의 위치는 가끔 한 군데로 쏠려 있다. 삼라만상의 이치가 그렇다. 언제나 균일하게 배치될 순 없다. 약간 실력이 붙을 만하니 두어 가지 재료가 떨어졌다. 그만 만다. 10줄을 말았다.

 


 

썬다. 오오, 신이시여 정녕 제가 만들었단 말입니까ㅡ이건 <벤허>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멘트고, 성공했다고 말하긴 부끄럽지만, 한다. 이천 원이면 충분한 김밥을 직접 마느라고 그 몇 배는 들었다. 실습비다.

 

2. 옷이 줄었나?

스커트를 입다가 흡, 숨을 끌어 당겼다. 힘들게 단추를 채운 후 숨을 내려놓고 나니 배가 위, 아래 이등분이 된다. 뭔가가 잘못 되었나? 갑자기 이럴리가....봄부터 초여름까지 입던 옷인데 말이다. 헐렁해서 골반에 걸쳐져 빙빙 돌아가지 않았던가.

 

가을은 역시 가을이다. 지난 겨울 봄 여름 내내 체중은 물론 식욕도 늘지 않더니 요즘엔 아침에도 밥을 먹는다. 배고픔을 느끼고 밥을 먹는다. 가을이 식욕에 발동을 건 모양이다. 먹고 나면 졸음이 쏟아진다. 봄도 아닌데 식곤증이 심하여 잠시 까무룩 자고 깨면 부석부석한 게 영 기분이 유쾌하지 못하다.

 

그러고 보니 안 먹던 새콤한 사과를 하루에 한 알은 먹는다. 일 년에 한 번쯤 입에 댈까말까 하던 초코렛을 어젠 세 알이나 먹었다. 지금도 난데없는 오이를 깎아 먹고 있다. 아랫배가 전보다 훨 묵직하다. 아니, 이 증세는...? 놀라 달력을 본다. 날짜가 많이 지났다! (뭔 상상들을?) 결국 오늘도 배설 시스템이 원활하지 못했다. 아락실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무작정 신호 오기를 기다리자니 몸이 둔해 언짢다. 가뜩이나 중부지방이 두툼해졌는데 말이다. 살이 쪘다기보다 옷이 줄었다고 위로하며 먼지 앉은 훌라후프를 꺼내 닦는다.

 

철학적인 가을이다. 너무 후텁지근한 날씨여서 이러다가 가을 바바리 코트도 못 입어보고 다 지나가겠다고 투덜댄다. 5월부터 덥기 시작해서 일 년의 반을 땀 흘리며 살기엔 세월이 아깝다. 어서 가을이 쌀쌀해지고 겨울이 오면 더 행복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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