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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기55

나무 테이블 큰 나무 테이블을 갖고 싶었다. 너무 짙지도 옅지도 않은 알맞은 브라운에 번들거리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8인 이상 제멋대로 흩어져 앉을 수 있는 크기면 흡족하다. 상판은 통판이어도 좋고, 단단한 목재를 이어 붙여 홈이 기찻길처럼 나 있어도 좋다. 그런 나무 테이블을 내 작은 집에 두자면 집이 꽉 차서, 몸을 모로 세워 모서리 비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가끔은 미처 몸을 구부리지 못해 골반쯤에 멍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무 테이블에 뒤따르는 걱정은 그런 공간 확보가 아니다. 그것은, 냄비 자국이 나면 억울해서 어쩌지다. 냄비 받침을 놓으면 되는데 참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받침 놓는 것을 깜박 잊고 테이블에 뜨거운 뚝배기를 덜컥 올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깊은 화인(火.. 2015. 11. 12.
Kol Nidrei 듣는 밤 #1 따뜻한 가을날이 이어진다. 등에 땀 배는 가을은 짜증스럽다. #2 늦게 장을 보았다. 마트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면 교차로 건널목 두 개를 이어서 건너야 한다. 두 번째 건널목은 샛길이어서 폭이 좁다. 차나 사람들은 (차도 사실은 사람이다)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다니기도 한다. 밤 9시 35분, 오늘은 건널목에 선 사람이 나 혼자다. 초록불로 바뀌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느리게 건넌다. 고백하자면, 고의로 느리게 걸어 보았다. 신호대기 중인 차들은 내가 은근히 밉겠다. 하지만 차는 속상할 권리도 없고 속상해서도 안 된다. 초록불 시간은 어디까지나 보행자의 몫이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서다. 초록불이 남았는데도 다 건너버렸다. 나는 건너자마자 휙 뒤돌아 보았다. 차들이 어떻게 하나 보기 .. 2015. 10. 21.
봄이라지만 그 봄날, 대웅전에 엎드려 울던 당신을 보았다. 거슬러 짐작하니, 그때부터였을까. 당신은 내 사람 아니라고, 가만히 마음에 선을 그은 것이. 내 사랑과 당신 사랑이 백 년 닿아 있어도 결코 서로를 물들이지 못하여 결코 서로를 나눠 갖지 못하여 그래서 외로운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머릿결 쓰다듬듯 순순히 삶의 결을 따를 수밖에. 막다른 사막에 서서 서로가 서로의 사람이었음을 기어이 깨닫는다 해도. 2015. 1. 26.
겨울이 오네 늦은 11월, 식물들은 가장 작은 부피로 마르기 시작한다. 가을은 극과 극의 계절이 아닌가. 단풍으로, 열매로, 꽃으로, 제가 가진 최고의 순간을 펼쳐 보인 후 수직 강하, 남는 것은 바스러짐. 우리는 그들의 풍성함만 칭송한다. 꽃 특히 장미를 사면 그 생명이 미처 다하기도 전에 거꾸로 매달곤 했다. 완전히 시들어 버리면 예쁘게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꽃잎에 아직 꼿꼿한 힘이 있고, 세포에 물기가 남아있을 때가 딱 좋았다. 꽃은 자신이 가진 수분을 내주면서 다른 색으로 옮겨 갔다. 검어진 빨강, 창백해진 분홍, 바랜 노랑. 말라가며 드러나는 얼룩, 빳빳하게 저항하는 몸체, 그것을 보려고 꽃을 목매달았다. 아름다웠다, 꽃값을 셈하며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길어지기 전까지는. 이젠 장미를 말리기는커녕 사.. 2014. 11. 20.
핑계 심노숭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 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만약 마치 오줌이 방광으로부터 그곳으로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눈으로 나온다면 저것은 다 같은 물의 유로써 아래로 흐른다는 성질을 잃지 않고 있으되 왜 유독 눈물 만은 그렇지 않은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물인데도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이치가 있단.. 2014. 8. 16.
사랑 <단풍철쭉> 찍은 사진마다 미세하게 흔들려서, 드디어 수전증까지 왔구나 혀를 찼다. 호흡을 멈추어 가슴의 오르내림을 방지할 것, 그리고 생각도 멈춘 후 찰칵. 이번엔 콩만 한 꽃들이 일제히 바람에 몸을 흔들었다, 흔들렸다. 멈추지 못한 그 무엇, 아직 내게 남았을 테지. 남았을 거.. 2014. 4. 24.
제목 없음 #1 선인장까지 말려 죽이고 있다. 생각해 보니, 선인장이란 이유로 거의 물을 주지 않았다. 언젠가 아이가 사 온 것인데 화분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크기, 저게 암만해도 조화지 싶었다. 조화 같은 선인장은 시들어서 살아있음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2 집으로 오면서 볶음용 .. 2013. 6. 5.
벌써 그립다 아침마다 국을 끓이고 따뜻한 밥을 푸는 사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외투를 여미며 종종걸음쳐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오후 2시, 그 사이로 나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우울과 회의를 거듭하는 사이 겨울이 하루하루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그래 좋다.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겨울이 가혹한 누군가에게는 희망이리라. 쪽방촌 노인들의 절박하고 고단한 겨울나기를 보며 나는 감히 겨울을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겠다. 들키지 말지어다. 머잖아 따뜻한 날이 줄지어 오면 겨울이 끝나고 말았음을 인정하는, 그것도 좋겠다. 다만 이상하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리운 것은. 2013. 1. 17.
제목 없음 #1 비로소 나는 오랜 숙제를 실천했다. 나는 충분히 외로웠다. 외롭고자 했던 내 뜻을 이루었다. 내 고독이 평화로워서 참으로 다행하다. 더구나 봄, 나는 시기를 잘 선택하였다. 산뜻하고 가볍다. 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잊어질 것이다. 이 길을 그 옛날 왜 선택하였는지는 비밀에 부쳐지.. 2012. 5.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