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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기55

흘러가자 뒷베란다의 창으로 선선한 바람 한 줄기가 들어온 날이었어. 양파를 가지러 간 참이었지. 바람이 얼굴과 머리카락을 스치는 순간 멈칫했어. 와, 드디어 가을이 왔구나, 바람이 가벼워졌네. 나는 양파를 한 알 든 채로 창가에 서서 다음 바람을 기다렸지. 이미 9월이었거든.  하지만 나의 성급한 판단이었어. 그다음 바람은 없었어. 여러 번 말했다시피,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비가 있지. 바람이 아닌 비. 이 비 그치면 봄이, 가을이, 겨울이 올 것이라고 시인들도 다정하게 알려주었어. 비가 온다고 반드시 계절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계절이 바뀔 때는 반드시 비가 있지. 수학시간에 배운, 명제가 성립할 필요과 충분조건처럼 말이야.  결국 비가 왔어. 그동안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아 뜨거운 세상을 식히지 못했지. 밀렸.. 2024. 10. 12.
만져지지 않는 것 이곳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요.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춥지 않은 건 아니에요. 겨울이니까요. 건조하고 사나운 바람이 하루종일 불 때면 추위가 가혹하게 느껴지곤 해요. 올겨울은 자주 비가 내려 더 을씨년스러웠어요. 폭신폭신한 눈 아닌 비가 오면 서운함에 말문을 닫습니다. 대신, 비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파열음에 귀 기울입니다.  겨울이 다가올 기척이 나면 사람들은 숨을 궁리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따뜻하고 안전하게 은신할 것인지에 골몰해요. 창을 살피고, 문풍지를 달고, 김치와 밑반찬을 비축하고, 하룻밤만에 자라 버린 아이들 패딩을 체크하고, 통장잔고를 보며 한숨도 쉬지요. 빙판을 조심해서 외출을 삼가거나 만남을 미루기도 해요. 이번 주는 최강 추위래, 꼼짝 말고 집에 있어야겠어.  기다리던 겨울이 온다니 마.. 2023. 2. 23.
茶 한 잔 우려내는 잡념 아침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커피를 마시지만, 저녁식사 후엔 되도록 커피 아닌 茶를 마시려고 한다. 일찍 어두워지는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나도 덩달아 저녁밥을 일찍 먹었다. 시각에 따르지 않고, 날이 어두워지면 밤이고 환하면 낮인 원시인처럼. 밤 9시쯤 되니 이른 저녁밥으로 더부룩하던 속이 꺼지고 그 자리에 빈 공간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저녁밥 이후로는 뭘 먹는 습관이 아닌지라 고작 茶를 한 잔 마실 뿐이다. 茶가 우려지는 동안 멍하게 찻잔을 바라본다. 아 맛있는 색깔이다, 혹은 내 집은 언제나 조용하구나, 고작 이런 따위의 상념. 생각해 보면 평생을 고독한 사람인데, 새삼스러운 자각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아들이 보내준 MBTI 유형을 해 보니, 나는 '용감한 수호자'였다. 다소 애매했던 답변을 과.. 2022. 6. 30.
겨울 예고 아침 8시가 넘자 햇살이 거실로 들어온다.베란다에서 주방까지 낮고 길게 뻗는다.동쪽의 높은 건물을 비집고 오늘의 해가 당도했다는 신호다.나는 햇살이 미치지 않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아침햇살의 진군을 본다.해가 높아질수록 햇살이 조금씩 짧아지다가 거실 가운데로 올 때쯤, 커피가 고파진다.간혹 커피잔을 들고 그 햇살 속에 발을 쓰윽 담가보기도 한다.맨발이 창백한 시절이 되었구나, 그렇게  나의 하루가 온다. 갑자기 입동이다.지난 봄꽃과 끈적이던 여름과 미친 태풍이 믿어지지 않는다.무릇, 끝에 서서 뒤돌아보면 그 긴 세월이 무엇이었나 짧고 허망할 따름이다.       ※첫1회는 손수 클릭해야 음악이 실행됩니다.그 다음부터 죽 자동실행~.익스플로러와 크롬의 다른 점이네요. ㅠㅠ 2020. 11. 8.
봄이라고! #1. 소문에 로스께들은 시커먼 빵덩이를 베고 잔다네, 그카다가 배고프면 썩썩 베서 묵고, 아이고 더러븐 넘들. 엄마의 말이 떠올라 나는 비싯 웃는다. 파리바게뜨 모카 빵을 썰 때면 부록처럼 엄마의 말과 표정이 따라온다. 로스께의 베개 겸용 빵 덩이와 모카 빵은 비슷하지도 않을 텐데 그 접점을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 수십 년 전 어느 날 들었던 이야기는 이렇게 내 빵 접시 위에서 부활하곤 하지. 본 적 없는 로스께 군인은 소문 속에서 더러운 놈으로 완성되었다가 다시 빵 봉지에 묶여 봉인된다. #2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더구나 인간으로. 빵과 커피와 아몬드 한 줌을 점심으로 먹고 모처럼 한낮에 수목공원으로 간다. 뉴스로부터 나를 떼내어야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와 울분과 걱정.. 2020. 3. 4.
어디쯤 #1 무기력하고 또 무기력하다. 시간을 보람없이 흘려보내는 일이 죄 같다. 날마다 해가 지면 죄책감에 한숨을 쉰다. #2 세상은 봄이라는데 나는 걷기를 한겨울보다 자주 빠진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기대고 비가 오면 비에 기대어 나를 집에 가두었다. 며칠 전, 우연히 친구 따라 만보기 앱을 휴대폰에 깔았다. 몇 걸음 걸었나 확인해 보는 재미가 의외로 제법이다. 뜻밖의 유치한 동기부여. 어제는 6233보, 그제는 오전에 비 와서 2664보. 집을 나서면 기분 좋게 걷곤 한다. 문제는 집을 나서는 것이 가장 힘들다. #3 돌아가고 싶진 않아도 그리운 것들. 2019. 4. 12.
젊은 날 #1 제법 몰입해서 보았던 드라마가 지난주에 끝났다. 여러 <마더>의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사건은 극적이지만 행동과 대사가 담백하였다. 사람은 제각각이니 엄마의 모습도 제각각임이 당연하다.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는 엄마는 딱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 2018. 3. 19.
혼잣말 나는 죽은 것 같다. 춥다. 움직인 것에 비하여 과하게 고단하다. 이부자리 구석에 몸을 처박고 정지화면으로 고요히 버틴다. 세수쯤 이틀에 한 번 하기 예사다. 그저께는 아침에 먹은 그릇을 한밤중에 가만가만 설거지했다. 망상을 할지언정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배도 안 고파야 옳은데, 치사하게 배는 고프다. 하지만 찌개나 국이나 전골이나 나물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것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간단한 것을 자주 찾으니 밀가루 음식이 는다. 빵, 칼국수, 우동, 심지어 1년 가도 안 먹던 라면까지 산다. 얼마 전 선전에 혹해 ㅇ짬뽕을 한 팩 샀다. 한 봉지를 끓여 먹는 첫 입에 욕이 나왔다. 이게 짬뽕 맛이냐, 이맛도 저 맛도 아니자너, 어디서 허풍 광고질이야!! 나머지 4봉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밀가루를 .. 2016. 3. 1.
알 수 없다 #1 벌써 몇 달째 동네 곳곳의 하수관을 재정비 공사 중이다. 아파트 옆길의 포장을 깨부수고, 파고, 묻고, 덮더니 다음에는 아파트 앞길을 깨부순다. 아파트 정문 앞길을 공사하던 며칠간은 소음에 신경이 갉아 먹히는 듯했다. 저녁 6시가 가까워지면 어느 골목에서 일하던 포크레인이 퇴근을 했다. 조그마한 포크레인은 어떤 날은 초록색이고 어떤 날은 노란색이었다. 멀리서 웅웅 땅을 울리며 다가와서 웅웅 땅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 느리고 요란한 포크레인의 퇴근이 끝나면 하루의 소음도 퇴근했다. 비로소 동네는 적막하다. 나는 포크레인이 멀리서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면 흘낏 시계를 보았다. 오늘은 일찍 일이 끝나네, 오늘은 늦게까지 일을 했구나, 나와는 상관도 없는 가늠을 하며 창가에 붙어 서서 내려다본다. 가끔은 이.. 2016.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