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31
다들 힘겹다는 5월을 나는 조용히 보냈다.
챙길 어린이도 이젠 없고, 몇 년 후 어린이가 생기면 좋겠지만 그건 내 영역 밖의 일이다.
어버이날 친정방문은 울 아부지한테 거절당했다.
다녀간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오라고 하셨다.
자식들의 기념일 방문은 자신의 일상에 도움도 안될 뿐더러 생활리듬만 깨져 싫다는 것이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우리 마음대로 불쑥 갔다가는 혼난다.
오지 말라고 해주니 몸은 편하면서도 마음은 무거웠다.
숙제 제출이 연기되어 계속 들고 있는 기분이랄까.
친정이 만만하다고 누가 그랬나.
굿바이 5월.
2017. 6. 5
머리가 덥수룩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때부터 생각은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껌 같아진다.
당장 자를까, 더 길러 묶어서 여름을 지낼까? 빠마를 감행할까? 자면서도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럴 것이다. (근거 없는 통계)
도구의 동물답게 나는 큰 바느질 가위와 숱가위를 이용하여 셀프로 내 머리통을 손봐주었다.
가뜩이나 풍성하지 않은 머리카락을 이쪽 자르고 저쪽 오렸더니 예상대로 빈약한 꼴이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 곧 덥수룩해질 것이다.
다시 자라지 않는 것들이 문제다.
이를테면, 키. 연골. 손가락. 통장 잔액. 기억력 그리고 삶의 쾌락적 성장판.
2017. 6. 11
아버지의 호출이 있어서 친정에 갔다.
엄마 점심을 드시게 한 후 아버지는 생애 최초의 압력밥솥을 사러 외출하셨다.
나가는 김에 국밥도 한 그릇 먹고 오겠노라 하셨다.
아버지 나가고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엄마는 아버지 오는지 내다보라고 성화다.
벌써 오시겠냐며 버티고 나가지 않으면 얼마나 사람을 볶아대는지 모른다.
원 신랑이 그리 그리운가.
내가 흐흐 웃으며, 엄마 신랑이 그리 좋소? 하면 옛날엔 싫다 하시더니 요즘은 응 하신다.
이제 엄마에겐 자식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그저 자신을 돌봐주는 곁의 사람이 가장 필요할 뿐.
아버지는 무거운 밥솥을 들고 땀을 쏟으며 오셨다.
홈쇼핑으로 주문하면 쉬울 텐데, 함께 살아드리지 못하는 자식들이 죄다.
2017. 6. 18
아들은 집에만 오면 기상이 한낮이라, 오늘은 일찍 10시에 아침빕 먹자고 깨웠다.
상의 언더웨어와 흰 셔츠를 사러 가자고 어젯밤 약속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홀쭉하더니, 그새 배가 나와서 셔츠 단추가 폭발할 듯했다.
아들은 밥을, 나는 샐러드로 아침을 먹었다.
내가 냉장고에서 비트 담은 통을 가지고 오자 아들이 넘겨다 보며 말했다.
그기 머꼬, 선지가?
헉, 선지....! 엄마 그렁 거 안 먹자너! 비트다, 뿌리채소.
아들넘은 시선을 거두며 후속 말이 없다.
즉, 관심이 끝났다는 것이다, 쉐끼....
쿨소재 런닝 두 장을 제 돈으로 산 후, 셔츠 사러 가자고 했더니 나중에 지가 알아서 사겠단다.
내가 사주겠다고고고고 했으나 굳이 사양한 이유는 분명 귀찮아서일 거라고 짐작했다.
길을 걸을 때도 나만 떠들고 아들넘은 휴대폰 보며 건성으로 응응 한다.
청소년처럼 뭐 그리 폰을 손에서 못 놓노, 한마디 하고 더.러.버.서 더는 말 안 걸었다.
오후 3시 아들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나는 서운하고 애틋한 표정으로 팔을 흔들어 주었다.
민소매 밖의 팔뚝 살도 힘차게 흔들렸다.
살 떨리는 배웅 후 바로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아들과의 2박 3일이 왜 이리 고단한지, 울 아부지도 이래서 우리를 오지 말라 한 건지, 그것을 알고 싶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어제 오후부터 밤까지 비가 내렸다.
하지만 울타리의 장미는 선 채로 이미 드라이 플라워.
꽃잎을 떨구지도 목을 꺾지도 않고 꼿꼿이
누가 일부러 말리기나 한 것처럼.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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