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1. 04.
털모자를 눈썹뼈까지 깊게 내려쓴다.
넓은 자외선 차단 마스크를 눈 아래까지 올려 쓴다.
이쯤 되면 눈만 빼꼼 나왔다.
돼쓰...위장 끝.
긴 패딩 코트에 두 손을 찌르고 마트를 향해 걸었다.
저 앞에서 누군가가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자세히 안 보았다.
거리가 좁혀졌을 때야 나를 향한 부름과 손짓이라는 걸 알았다.
옛날 이웃 사람인데 나는 늘 저 여자를 못 보고 스치지만, 저 여자는 늘 나를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부르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시력 나쁜 내가 헐렁헐렁 지나가기 전에 멀리서 팔까지 흔들며 나를 불렀다.
도대체 내가 나임을 우뚜케 알아보았지?
내 눈알을 그 멀리서 무슨 수로 간파했으까?
얼굴을 감싼 이유는 연말에 점, 아니 검버섯을(슬픔...) 뺐기 때문이었다.
김 여사를 따라 피부과에 갔을 때만 해도 내 딴에는 통 크게 열댓 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잔인한 레이저는 내 얼굴에서 백만 스물두 개의 반점을 수색하여 갈아엎어 버렸다.
일주일 후 딱지는 떨어졌지만 붉고 진한 자국은 여전하고, 또 자외선을 피해야 하므로 눈만 내놓고 다녔던 것이다.
감쪽같이 위장한 나를 알아본 그녀의 신통력을 아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웃었다.
엄마, 가린 곳보다 안 가린 곳 면적이 수십 배는 되는데 왜 몰라? 딱 보면 그 사람의 몽타주가 나오지."
2018. 01. 11.
남쪽지방도 연일 혹독하게 춥다.
바람까지 부니 체감온도는 더 낮을 것이다.
이 추위에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볼일을 보러 버스정류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 추위에 굳이 보도블럭 움푹 깨진 곳을 디딜 건 뭐람.
왼쪽 발목을 확 접고 꼬꾸라지며 오른 무릎을 가차 없이 보도블럭에 꿇었다.
아, 아포.....!
옛날 같으면 무지 쪽팔렸을 텐데 희한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내 발목만 걱정되었다.
쩔뚝이며 몇 걸음 걸어 보니 얼얼하던 발목이 조금씩 풀어졌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구나 안도했다.
<버스에 앉은 후 이번에는 오른쪽 무릎을 살포시 걷어보았다.
허걱, 완전 다 까져 피가 맺히고 멍도 퍼렇다!
바지는 멀쩡하고 그 안의 정강이와 무릎이 까진 게 그 와중에도 미스테리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보일러가 얼더니 낮에는 넘어지고 밤에는 전기 주전자가 고장 났다.
새해맞이 사고가 줄지어 온 날.
2018. 01. 17.
이르면 1월 중순쯤에도 피는 홍매화가 어찌 되었나 보러 갔다.
조그맣고 볼긋볼긋한 꽃망울들이 온 나무에 돋아 있었다.
저 꽃망울이 굵어지다가 천천히 우주를 열기까지 열흘이면 충분해 보였다.
어제오늘 따뜻한 비까지 제법 왔으니까.
장석남 시인은 꽃의 흉터가 열매라 했다.
꽃이 번져 열매라 했다.
그런데, 그냥 피기만 해도 된다, 열매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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