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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記

여름 부스러記 10

by 愛야 2018. 9. 7.

 

2018. 7. 17

아들 생일이다.

올해는 미역국 대신 소고기 뭇국이다.

이런저런 시험을 앞둔 녀석에게 굳이 미역국을 끓여 먹이고 싶지 않았다.

미신 따위 잘 알지도 믿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별수 없이 노인네 흉내를 내고 말았다.

말하자면, 두려운 게지.

아들은, 심지어 고3 때도 안 그러더니 새삼 왜 그러셔,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안다.

근데 지금은 어쩐지 그러고 싶네?

 

 

2018. 8. 5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듣고 다시 잠이 깜빡 들었나 보다.

눈을 퍼뜩 떠서는 멍하니 시계를 올려다보다가 으악 소리치며 튕겨 일어났다.

친정에 가기로 한 날인데, 시간이 늦어버린 것이다.

서둘러 냉장고에서 배추김치 작은 통과 열무 물김치 큰 통을 꺼내 싸고, 양치와 눈곱을 뗐다.

밥은커녕 커피 마실 시간도 없었다.

일찍 오지 한창 더운 한낮에 오느냐고 아부지가 뭐라 하실 텐데.

볼 때마다 조금씩 더 땅에 가까이 굽어지는 엄마와 아버지.

아직 내가 찾아갈 곳이 있다는 이 자기중심적 위안에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혹독하게 더운 날이었다.

 

2018. 8. 15

얼마 전 랜섬웨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진을 다 날렸었다.

음악은 다행히 원본 파일은 괜찮고 확장 파일만 다 잠겼다.

음악 원본 파일과 인증서 등을 usb에 옮긴 후 컴퓨터를 버려야 했다.  

오래 쓴 컴퓨터라 컴퓨터에 대한 미련은 없으나, 못쓰게 된 사진이 아쉽다.

훌륭하지 못한 사진이지만 그중에는 몇몇 의미 있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안타깝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걸 열자고 랜섬 바이러스 자슥들에게 암호값을 치를 마음은 더더욱 없으니.

내 컴퓨터를 폐기한 후 아들 컴퓨터를 물려받아 쓰게 되었다.

자신의 컴퓨터를 설치해 주며 아들은 나에게 잔소리를 하였다.

제발 쓰레기 같은 익스플로러 쫌 쓰지 말라고!!

싫어, 쓸거야!

갈아타기 힘들다는 걸 아직 모르는 젊음.

 

그리하야 첨부할 사진이 없다.

긴 세월 동안의 사진이 모두 사라지자 내 과거가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증거의 무엇,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시간

꽃과 바다와 군인 아들과 내 늙은 엄마의 손과 그대를 향해 찰칵 울렸던 마음이 있었음은 이제 나만 알게 되었다.

시간은 그것조차 점점 옅게 보관해 줄 테지.

 

2018. 9. 1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9월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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