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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가지가지

by 愛야 2024. 4. 12.

  #1

바늘이 굵어서 조금 따끔하실 거예요, 간호사는 상냥하게 말했다.

네, 괜찮아요, 혈관이나 잘 나오면 좋겠어요. 

오른쪽 팔에서 채혈 후 붙여둔 알코올 솜을 보더니 그녀는 왼팔을 선택했다.

혈관이 잠복해 있을 법한 곳을 톡톡 두드리며 탐색했지만 왼쪽 팔은 신통찮았다.

역시 오른팔이 좋군요.

그녀는 능숙하게 오른쪽 손목과 팔꿈치 사이 어디쯤에 바늘을 꽂았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따끔했다. 

그렇게 CT촬영을 위한 조영제가 들어갈 채비를 끝냈다.

 

  #2

1년에 한 번 점검 차원에서 하는 CT촬영이다.

닫아두었던 주삿바늘 캡을 열자 조영제가 혈관으로 흘렀다.

우리의 피돌기는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내 몸을 돌아 내려가나 보다. 

조영제의 흐름은 선명한 뜨거움으로 감지되었다.

목 근처가 뜨겁더니 곧 가슴팍이 후끈 뜨거웠다.

사랑으로도 뜨거워지지 않던 가슴이 이런 식으로 뜨거워지다니.

숨 들이마시고 참으세요, 숨 내쉬세요, 나는 포로처럼 유순하게 구령을 따랐다.

 

造影이라....

내 복강 어딘가를 환하게 염탐하겠다는 속셈인 거지.

나는 의사에게 무엇을 더 발각당해야 하나.

이제는 나의 육신, 심지어 나의 정신, 신경과 근육과 세포 하나하나조차 믿을 수가 없다.

 

  #3

촬영이 끝나자 마자 빠른 조영제 배출을 위해  물을 계속 마셨지만, 이미 얼굴에 작은 두드러기 2개가 돋았다.

작년에는 큼직하게 한 개 돋더니, 해마다 다르다.

10분 정도 지켜보고 더 나빠지지 않으면 바늘을 빼 드릴게요, 간호사가 말했다.

네,  물이나 계속 마시며 기다리지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조영제 알레르기는 순하게 몸을 풀며 가라앉는 듯했다.

바늘을 뽑았다.

나는 바늘을 찌를 때보다 뽑는 순간이 늘 무섭다.

 

  #4

고작 두어 시간만에 병원을 나섰는데, 여기와 거기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자,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하지?

멍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오후 4시에 피부과 예약이었지.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달려 우리 동네 피부과에 도착한 다음 레이저 의자에 누웠다.

지난겨울부터 오른쪽 볼의 신형 10원 동전만 한 잡티를 없애느라 레이저로 들볶는 중이었다.

동일인 맞다, 좀전에 심각하게 CT 촬영한 그 사람과.

뱃속 장기까지 찍었는데, 죽고사는 문제도 아닌 피부 잡티쯤은 안중에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빠른 표피적 전향은 뭐람,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되어서 풀썩 웃었다.

불안하게 CT를 찍던 일은 백만 년 전이 되었다.

 

사람은, 사람이라서, 어떤 것도 숨길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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